[서촌에 세운 인텔리젠시아 1호점 이야기]
양반 주거지 북촌…서촌엔 전문 기술직과 예술인 자리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텔리젠시아…해외 1호점 서촌
인텔리젠시아, 생두 직거래·약배전하며 스페셜티 문화
커피 맛 살리는 바리스타…서촌점, 장인처럼 커피 내려
1940년 등록 한옥…햇볕 드는 중정에 만든 바테이블
미국 3대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텔리젠시아가 해외 1호 매장으로 2024년 문을 연 인텔리젠시아 서촌점./사진=인텔리젠시아 제공
오스만튀르크 시절엔 ‘현자들의 학교’, 17세기 영국에선 1페니 내고 논쟁적 대화에 참여하는 ‘페니대학’이라 불렸습니다. 오스트리아 신경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랑스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글을 쓰고 피카소는 예술을 말하며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겐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커피’를 대전제로 사람들이 모이는 유형의 공간, 우리는 ‘카페’라 합니다.
커피를 마시고 공간을 누리는 ‘끽(喫)’의 장소에서 이야기를 만끽(滿喫)합니다.
주말, 그 공간에서 ‘건축’ 한 잔 어떠신가요.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장이’.
흔히 장인(匠人)이란 뜻을 담아 특정 분야 최고의 기술자를 표현할 때 붙는 말이다.
글장이·소리장이부터 미장이·기와장이·떡장이까지….
서울 종로구 서촌은 바로 그 장이들이 조선 시대부터 모여 살던 동네였다. 지난 2024년, 그 서촌에 새로운 형태의 장이가 자리를 잡았다. 이름하여 ‘바리스타장이’다.
사람들은 ‘ㄷ’자형 한옥 툇마루에 걸터앉아 중정 한가운데 마련된 바 테이블에서 바리스타들이 커피를 내리는 걸 공연 보듯 바라본다. 그렇게 완성된 커피를 마신다. 미국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텔리젠시아 서촌점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건축역사학회장인 고려대 류성룡 건축학과 교수는 서촌과 한옥, 그리고 커피의 조합에 주목했다.
류 교수는 “장인이 나무의 나이테와 질감, 결 방향을 읽으며 짓는 게 한옥”이라며 “그 공간 안에서 원두 특성에 맞춰 장인이 만든 커피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고 설명했다.
‘-장이’들이 살던 동네, 서촌
서촌 ‘이상의집’은 작가 이상이 세 살부터 20여 년간 머물렀던 집터였던 곳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경복궁 서쪽에 자리해 이름 붙은 서촌은 조선 시대 양반 중심 주거지였던 북촌과 다른 성격을 지녔다.
북촌이 청계천과 종로 북쪽에 형성된 고위 관료와 사대부들의 공간이었다면, 서촌은 다양한 신분과 직업군이 공존한 생활 공간이었다.
조선 초기 왕족과 일부 사대부가 살던 서촌은 숙종 시기 중인 계층의 거주를 허용하면서 의원·역관·화원·악사 같은 전문 기술직들이 대거 자리 잡았다. 양반보다 신분은 낮았지만 기예와 전문성을 가진 장이들이 골목을 채웠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촌은 예술인들의 집결지였다. 이상·윤동주·염상섭·현진건·이중섭·천경자 같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문화예술 중심지 역할을 이어갔다.
지금도 서촌 골목에는 공방·갤러리·독립서점·카페가 공존한다. 오래된 한옥과 현대적 문화 공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 역시 서촌만의 특징이다.
해외 첫 1호점 서촌, 이유있는 선택
인텔리젠시아는 원두 생산 농가와 직접 거래한 원두를 약배전하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다. /사진=인텔리젠시아 홈페이지 캡처
바로 그 서촌에 블루보틀·스텀프타운 로스터스와 함께 ‘미국 3대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로 불리는 인텔리젠시아가 들어섰다. 1995년 미국 시카고에서 인텔리젠시아가 문을 열던 당시 미국 커피 시장은 원두를 검게 볶는 다크 로스팅을 통해 진하고 쓴맛을 강조한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가 대세였다.
그 시절 미국 커피 업계에 변화가 시작됐다. 원두 고유의 향과 산미를 살리는 약배전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인텔리젠시아는 이 흐름을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인텔리젠시아는 원두 본연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움직였다. 첫 단계는 원두 선정이었다. ‘다이렉트 트레이드’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 농가와 장기간 직접 원두를 거래했다.
농가와 오랜 시간 신뢰를 구축하며 확보한 최상급 원두는 강배전 대신 약배전으로 로스팅했다. 와인처럼 커피도 산지별 풍미와 계절감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원두 산지와 품종에 따라 로스팅과 추출 방식을 달리하며 향과 산미를 즐기는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만들었다. 스페셜티 커피는 미국스페셜티커피협회(SCAA) 기준 100점 만점 중 80점 이상을 받은 최고급 원두로 만든 커피를 뜻한다.
이후 인텔리젠시아는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인 찰스 바빈스키와 마이클 필립스를 배출하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해외 진출을 고민하던 인텔리젠시아가 주목한 곳은 한국이었다. 한국은 성인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세계 상위권이며 세계 최고 수준의 커피 소비 문화를 가진 시장이었다.
그렇게 인텔리젠시아는 2024년 3월 23일, ‘장이’들의 동네인 서촌에 한국 1호점이자 미국 밖 첫 해외 매장을 열었다.
서촌에 입주한 ‘장이’, 인텔리젠시아
목조 평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간살 형태로 만든 현대식 중문이 보인다./사진=서윤경 기자
인텔리젠시아는 한국을 단순 소비 시장이 아닌 새로운 커피 문화를 실험할 공간으로 봤다. 특히 서촌점은 브랜드 철학을 압축해 보여주는 공간으로 꾸몄다.
인텔리젠시아 관계자는 “인텔리젠시아는 매장을 꾸밀 때 지역과 이웃을 담고 있어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할리우드엔 지역 화가 작품을 모자이크로 재해석했고, 텍사스 오스틴점은 ‘도시 속 오아시스’ 콘셉트를 담았다”며 “미국 본사에 양반이 살던 북촌과 장이들이 살던 서촌을 설명하며 한옥 공간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찾은 이 한옥은 등기부등본부터 독특하다. 접수 시점은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 2월 2일, 건물 형태는 ‘목조와즙평가건본가(木造瓦葺平家建本家)’로 등록돼 있다.
일본식 건물 등기부등본에 사용되던 표제부 용어로 목조는 나무로 지어진 건물, 와즙은 기와를 얹은 지붕을 말한다. 평가건은 평면 가옥 형태, 본가는 주된 용도로 쓰이는 본 건물을 뜻한다.
인텔리젠시아 서촌점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탁트인 중정의 공간 한 가운데 바테이블이 시선을 잡는다. 천창에는 한낮 햇빛을 가리기 위해 하얀 차양을 설치했다. /사진=서윤경 기자
첫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평대문과 간살을 모티브로 만든 현대식 중문을 지나면 시선을 사로잡는 건 ‘ㄷ’자형 한옥건물이 아니다. 햇살이 들어오는 천창 아래 펼쳐진 중정이다.
그 중정 중앙엔 사각의 바 테이블이 자리했다. 원두 분쇄기와 에스프레소 머신, 수동 추출기구 플레어(Flair)58 등이 놓여 있고 바리스타들이 가운데 공간에서 커피를 내린다.
안채와 대청마루를 개조한 좌식 공간은 벽면을 따라 배치됐다. 일반 카페처럼 일행을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시선은 바테이블을 향한다. 마치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는 듯.
덕분에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조명이 되고 바리스타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손님들은 이 과정을 공연 보듯 바라본다.
벽면을 따라 배치된 좌식 테이블에서 손님은 바테이블에서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춧돌이 보이는 기둥, 대들보 형태의 목재에 넣은 조명, 소반상이나 교자상을 떠올리게 하는 테이블은 한옥의 정체성을 살렸다. /사진=서윤경 기자
공간을 완성하기까지 과정은 쉽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오랜 시간 식당으로 사용되면서 곳곳이 ‘습기’라는 직격타를 맞았다. 황토벽은 손만 대도 으스러졌고 목재인 기둥과 대들보는 80%가량 썩은 상태였다. 살릴 수 있는 옛 자재는 최대한 남기되 안전에 힘을 썼다.
썩은 기둥은 새로운 목재를 덧댔다. 보이는 옛모습은 기둥을 버텨주는 주춧돌 뿐이다. 조명은 대들보 형태의 목재 안에 넣었고 지붕을 받치는 서까래는 오래된 원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바테이블 위 천창은 햇빛을 막을 수 있도록 하얀 차양을 더했다.
안전에도 신경 썼다. 바닥 아래 1.5m까지 깊이 박힌 H빔은 건물을 안전하게 지탱하고 있다. 천창은 하중을 고려해 유리 대신 아크릴을 사용했다.
공간 조성 과정에서 애를 먹인 건 중정의 바테이블이다. 가옥이 있던 바닥면과 마당간 높이에 격차가 있어 제작된 바테이블을 설치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바닥 밸런스를 맞추는 데 세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날개를 단 커피잔이 별을 향해 날아가는 인텔리젠시아의 로고. 서촌점의 나무 로고엔 북악산 등고선이 들어가 있다. /사진=서윤경 기자
여기에 테이블은 작은 소반상이나 교자상 형태로 제작했다. 좌식으로 앉을 평상도 마련했다.
매장 안 벽면에 담은 인텔리젠시아 로고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다. 커피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이 로고는 날개를 단 커피잔이 별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두 개의 로고 중 나무로 만든 로고엔 경복궁 뒤 북악산의 등고선을 표현했다.
환대의 공간에서 커피 맛을 보다
4월 28일 로스팅한 르완다 므룬디로 원두를 주문했다. 플레어58 방식으로 추출된 커피는 탄산수와 함께 제공됐다. /사진=서윤경 기자
공연이 시작될 시간이다. 원두는 4월 28일 로스팅한 ‘르완다 므룬디’다. 로스팅 기간이 훌쩍 지난 이유를 설명하며 붙인 말이 ‘제철 커피’다.
인텔리젠시아는 수확 후 3개월이 지나지 않은 생두를 사용하고 있다. 약배전을 위해서다. 약배전 원두는 강배전한 것과 달리 표면에 기름이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로스팅 직후 원두 내부에 남아 있는 이산화탄소가 충분히 빠져야 본래 맛이 살아난다.
인텔리젠시아 관계자는 “로스팅한 뒤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 가장 맛이 좋다. 이산화탄소가 빠지는 과정에서 산미와 향, 단맛의 균형이 안정적으로 잡힌다”고 말했다.
원두를 골랐으니 다음은 추출이다. 서촌점에는 버튼만 누르면 커피가 나오는 전자동 머신이 없다. 대신 이탈리아산 라마르조코 반자동 머신과 수동 플레어58 에스프레소 기계를 쓴다. 핸드드립도 가능하다.
인텔리젠시아가 바리스타에게 ‘장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플레어58은 사람의 힘으로 압력과 시간을 조절해 커피를 추출한다. /사진=서윤경 기자
낯선 추출 방식, 플레어58을 선택했다. 원두와 뜨거운 물을 넣은 뒤 긴 손잡이를 사람의 힘으로 눌러 압력과 시간을 조절해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바리스타는 압력 게이지를 눈으로 확인하며 커피가 떨어지는 속도를 미세하게 조정한다.
인텔리젠시아 관계자는 “약배전 커피는 원두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추출 과정 컨트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압력과 시간, 추출량에 따라 맛 차이가 크게 난다”고 설명했다.
커피가 탄산수와 함께 나왔다. 탄산수는 혀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제공된다.
향을 맡고 커피를 마시는 순간 강배전 커피에서 느껴지는 탄맛은 없고 원두 자체의 향미가 길게 이어졌다.
그 동안 전통 한옥에서 커피를 즐겼으니 다음에 갈 곳은 정해졌다.
한옥의 정취를 가져온 요즘 건물 속 카페, 서울 구로구 항동의 9로평상이다.
/이미지=챗GPT·인텔리젠시아
y27k@fnnews.com 서윤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