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 국립외교원 인도태평양연구부 연구교수
지난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며 시작된 이란 전쟁은 일단 휴전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세계 에너지 시장이 받은 충격은 이미 현실이 됐다. 군사적 긴장은 완화되는 분위기지만 국제 유가와 항공유 가격은 이미 오를 대로 올랐고, 글로벌 경제에 대한 불안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충격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체감하고 있는 곳이 바로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떠오른 동남아시아다.
태국·싱가포르·필리핀은 대표적인 에너지 순수입국이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도 일부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중동 에너지 공급망이 흔들리면 동남아 경제가 직격탄을 맞는 구조다.
그러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란이 해협 통행권을 국가별 외교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란은 중국·러시아·인도·파키스탄 등 우호국 선박은 통행을 허용하는 반면, 미국·이스라엘 및 서방 동맹국 선박은 사실상 통행을 차단하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도 별도 협상을 통해 각자 통행권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은 이란과의 개별 협상 끝에 통행권을 얻어냈지만, 이 과정 자체가 해협이 더 이상 보편적 국제 항로가 아님을 보여준다.
최근 나타난 연료 가격 상승은 이런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보도에 따르면, 2월 말 이후 주유소 휘발유 가격 상승폭은 미얀마 약 두 배, 필리핀 약 70%, 베트남 약 25% 수준에 달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상승세가 동남아 지역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에 더 큰 위협은 에너지 수급 단절에 따른 불안보다, 가격 상승이 초래하는 경제적 충격이다.
동남아 지역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 중 하나가 된 만큼, 이 지역의 에너지 충격은 한국 경제에도 예사롭지 않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 동남아는 한국 기업의 핵심 해외 생산기지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중요 거점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지로 생산과 투자를 빠르게 확대해 왔다. 이 지역은 한국의 주요 중간재 수출 시장이자 완제품 생산기지로서 한국 기업 글로벌 네트워크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동남아 경제의 불안은 곧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해상 물류 불안정은 현지 제조업 비용을 끌어올리고 물류 지연을 야기하며, 더 나아가 한국 기업의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전반으로 파급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동남아 에너지 리스크를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로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다.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협력 외교를 병행해야 할 시점이 이미 와 있다. 중동에서 시작된 불씨는 동남아를 넘어 세계 경제로 번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에너지 공급망과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가 촘촘히 얽힌 시대에, 동남아 경제의 안정성은 지역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 안정성의 핵심 변수다.
박민정 국립외교원 인도태평양연구부 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