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LG전자 프로젝트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 크리스틴 선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전시
55인치 OLED 72대 설치 최대 규모
공간 전체 영상·텍스트 등으로 채워
소모적 논쟁 아닌 소통 의미 되새겨
김 크리스틴 선의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전시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내부 중심 공간.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거대한 곡면 화면 위로 선과 기호가 빠르게 뻗고 꺾이며 서로 부딪친다. 화면 밖으로 이어진 드로잉은 벽과 바닥을 타고 서울박스 전체로 번지고, 공간을 채운 사운드는 움직임에 리듬을 더한다. 그 사이를 걷는 관람객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감정이 충돌하고 다시 관계를 맺는 장면 한가운데 들어선 듯한 감각을 경험한다. 현대미술과 디지털 기술의 접점에서 새로운 시각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국립현대미술관-LG전자의 중장기 프로젝트 전시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는 11월 29일까지 서울관 서울박스에서 ‘MMCA×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을 개최한다고 6일 밝혔다.
올해 주인공은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세계적인 아티스트 김 크리스틴 선이다. 1980년생인 그는 드로잉과 벽화,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언어와 소리, 번역과 접근성,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방식을 탐구해 왔다.
김 크리스틴 선은 지난해 영국 현대미술 전문지 ‘아트리뷰’가 발표한 ‘파워 100’에서 세계 현대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 34위에 선정됐다. 같은 해 미국 휘트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해당 전시는 2026년 미국 워커아트센터로 순회했다. 일본 모리미술관, 독일 베를린비엔날레 등에서도 작품을 선보이며 언어와 소통, 접근성을 둘러싼 동시대 담론을 확장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길이와 높이가 모두 33m에 이르는 내부 중심 공간 서울박스를 위해 제작한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을 공개한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드로잉, 벽화, 텍스트, 사운드가 서울박스의 개방적인 건축 구조와 결합해 공간 전체를 하나의 조형 환경으로 바꾼다.
서울박스 벽면에는 세로 8.1m, 가로 5.4m 규모의 초대형 곡면 OLED 디스플레이가 설치됐다. 55인치 LG OLED 스크린 72대로 구성된 이 화면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인 곡면 디스플레이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다. 화면 속 애니메이션은 벽과 바닥을 가로지르는 그래픽, 공간에 울리는 사운드와 연결되며 평면과 입체, 영상과 건축의 경계를 흐린다.
작가는 드로잉을 독립된 이미지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과 기호를 움직임과 시간, 공간의 경험으로 확장하고 관람객들이 그 안을 직접 이동하도록 한다.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전통적인 감상 방식보다 공간을 가로지르며 이미지와 소리의 관계를 몸으로 느끼는 경험에 가깝다. 언어를 읽는 행위 역시 문장의 뜻을 해석하는 차원을 넘어 시선과 움직임, 거리와 방향을 통해 의미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확장된다.
작품의 주요 조형 언어는 고전 만화의 ‘모션 라인’과 미국 수어의 움직임에서 출발한다. 만화에서 속도와 방향, 충격과 긴장을 표현하던 선은 이번 작업에서 언어와 감정, 관계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시각적 장치로 변환된다. 화면과 벽면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서로 다른 감각과 언어가 만나고 엇갈리며 다시 조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 크리스틴 선은 미국 수어의 구조와 음악의 악보에서 착안한 그래픽 노테이션, 손글씨, 도표와 문장 등을 자신만의 시각 언어로 발전시켜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대화의 긴장을 선과 기호, 리듬으로 옮기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누가 소통에서 배제되는지를 묻는다.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 작업은 특정 공동체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언어와 번역, 차이와 이해, 접근성과 공존이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시 제목인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상호 이해에 이르지 못한 채 반복되는 갈등과 소모적인 논쟁을 은유한다. 온라인 매체를 통해 양극화된 주장과 정치적 담론이 증폭되고,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상황을 바위와 끝없이 논쟁하는 감각에 빗댔다.
작품 속 ‘바위’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완고한 타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확신에 갇혀 타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과 언어 및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고착된 질서까지 함께 가리킨다. 작가는 소통이 정해진 의미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닌, 서로 다른 감각과 입장을 지속해서 조정하고 번역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가 제시하는 소통은 차이를 지우거나 모두를 하나의 언어 안에 넣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감각과 입장을 지닌 타인과의 거리를 끊임없이 조정하고, 완전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전시는 완고한 상대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보다 혹시 자신도 누군가에게 움직이지 않는 ‘바위’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를 되묻는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김 크리스틴 선은 언어와 소리, 접근성과 번역이라는 동시대의 중요한 의제를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확장해 온 작가”라며 “이번 신작은 예술과 기술의 창의적 협업과 동시대 미술이 제시하는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보여주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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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