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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 류승룡, 아이의 손은 놓지 않고, 대상의 영광은 내려놓고[인터뷰]

류승룡. 플레이그램 제공. 뉴스1

‘비광’ 스틸 컷. 뉴스1

[파이낸셜뉴스] 치킨집 주방에서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고 외치며 관객을 웃긴 위장수사 형사(영화 ‘극한직업’).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이처럼 엉엉 울던 블랙요원(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 대기업 부장이라는 명함을 잃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평범한 직장인(JTBC 드라마 ‘서울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배우 류승룡이 빚어낸 인물들이다.

오는 2일 개봉하는 영화 ‘비광’에서는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된 남자 황중구로 돌아온다. 한국 야구의 간판스타였던 중구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딸 동주로 인해 톱스타 아내 남미(하지원 분)와 파경을 맞고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8년 뒤 동주(김시아 분)가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자 중구의 가족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뭉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중구와 그의 가족이 자꾸 생각난다. 중구로선 아이 때문에 ‘꽃길 인생’이 그야말로 진흙탕이 됐는데, 자신의 발목을 잡은 그 아이의 손을 끝끝내 놓지 않는다.

류승룡은 지난 25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오죽하면 나처럼 못난 사람에게 왔을까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라며 “까치발을 하고 라면을 끓여 먹는 그 아이의 뒷모습이 중구를 붙잡는다”고 말했다. 아이를 향한 측은지심이 결국 중구를 움직였다는 설명이다.

이지원 감독 손편지에 출연 수락

류승룡은 ‘7번방의 선물’ ‘무빙’ 등에서 여러 차례 아버지를 연기했다. 비슷한 역할과 우는 연기가 되풀이되는 것 같아 처음에는 ‘비광’의 출연을 고사했다. 그러나 이지원 감독이 진심을 눌러 담은 다섯 장 분량의 손편지를 보내오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편지를 읽고 나니 이전의 아버지 역할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모습을 꺼낼 수 있겠다는 도전 의식도 생겼죠. 붙잡아주신 감독님께 감사해요.”

‘미쓰백’을 연출한 이 감독은 신림동 고시원에서 6년 동안 시나리오를 쓰며 데뷔를 준비했다. 류승룡은 그런 감독을 두고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감독은 배우의 신발과 의상의 질감·색감·문양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치열함과 간절함을 믿었기에 김해숙·김선영·김영민 등 배우들도 기꺼이 중구의 가족이 됐다.

그렇게 완성된 가족은 세련되거나 완벽하지 않다. 서로 원망하고 짜증내며 툭하면 부딪친다. 그런데도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웃음과 사람 냄새가 난다. 류승룡은 “저게 가족이지 싶어 미소 짓게 된다”며 “가족이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5점짜리 패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화투에서 비광은 광이면서도 홀로 온전한 점수를 내지 못하는 패다. 그러나 다른 광들과 모이면 비로소 제 몫을 한다. 영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흠집이 나고 초라해졌지만 함께할 때 서로를 구한다. 류승룡은 “인생에서 갑자기 찾아온 문제가 반드시 나쁜 패만은 아니다”며 “간절히 움직이고 함께한다면 오히려 좋은 기운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준다”고 했다.

“여보, 동굴이 아니고 터널이야”

그 말은 배우 류승룡의 삶과도 포개진다. 그는 공연계에서 활동하다가 30대에 스크린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최종병기 활’로 눈도장을 찍고 ‘내 아내의 모든 것’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주연배우의 입지를 다진 뒤 ‘7번방의 선물’로 천만 배우가 됐으나, ‘손님’ ‘도리화가’ ‘염력’ ‘7년의 밤’의 연이은 흥행 실패도 경험했다. 영화 ‘극한직업’으로 다시 정상에 오르기까지, 흥행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배우다.

그는 “잘될 때는 그렇게까지 잘될 줄 몰랐고, 안 될 때는 그렇게까지 안 될 줄 몰랐다”고 돌아봤다. 인생의 파고를 직접 겪고 나서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널리 알려졌듯, 당시 아내의 한마디는 큰 힘이 됐다.

“힘들 때 아내가 ‘여보, 이건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야. 터널이라면 조금만 더 가면 빛이 나와’라고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갈 만하더라고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영원한 것은 없어요. 마음에 여백을 넉넉하게 두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비광’ 스틸 컷/ 뉴스1

대상 영상이 오래 머물자…가발 쓰고 ‘니가 좋아’

‘무빙’에서 액션과 멜로, 부성애를 아우르며 제2의 전성기를 연 그는 지난 5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로 제62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부문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그때도 그의 시선은 산 정상보다 아래를 향했다.

“바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 잘될 때 지키는 원칙이다. 영화 ‘극한직업’이 신드롬급 흥행을 이어갈 당시에도 동료들에게는 “이빨 보이지 말고 90도로 인사하자”고 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백상예술대상 수상 영상이 너무 오래 남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스스로 영광을 끌어내릴 방법을 찾던 그는 같은 소속사 배우 오정세가 출연한 영화 ‘와일드 씽’의 홍보 도우미를 자처했다.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쓰고 ‘네가 좋아’를 부르는 챌린지 영상으로 근엄한 대상 배우의 이미지를 기꺼이 깨뜨렸다.

“제 인스타그램은 제가 관리하거든요. 백상 영상이 너무 오랫동안 앞에 있는 거예요. 빨리 끌어내리고 싶었어요. 영화도 응원하면서, 마침 좋은 기회였죠.”

수제비집 옆자리 손님에게 손가락 걸며 “영화 보기”

‘비광’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점심시간에 하지원 등과 삼청동의 한 수제비집을 찾은 그는 옆자리 손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더니, 영화관에서 꼭 만나자며 손가락까지 걸었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본 기자 역시,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저씨 배우’의 넉살에 넘어가지 않기란 쉽지 않았다.

류승룡의 매력은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연기력에만 있지 않다. 삶의 쓴맛을 알기에 오만해지지 않고, 정상에 올랐을 때는 내려갈 때를 헤아린다. 무엇보다 자신의 영광마저 스스로 웃음거리로 만들 줄 안다.

‘비광’의 중구가 아이의 작은 등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듯, 류승룡 역시 자기 앞의 빛만 좇지 않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순간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그의 삶의 태도와 유머 감각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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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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