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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처럼 살기 싫어서요" 승진 거부하는 이사원… '만년 대리'가 꿈인 시대 [김부장 vs 이사원]

승진=성공이라는 4050 vs “책임만 늘고 가성비 최악”이라는 2030의 동상이몽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

[파이낸셜뉴스] “이 사원, 이번에 과장 승진 대상자지? 이번 주말에 고과 준비 좀 같이해볼까?”

토요일 아침, 영업팀 김 부장(49)의 격려 섞인 제안에 이 사원(28)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부장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번에 승진 대상에서 제외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대리로 일하는 게 제 삶의 균형에 더 잘 맞을 것 같습니다.”

김 부장은 귀를 의심했다. 그에게 승진은 곧 생존이었고, 조직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척도였다.

하지만 이 사원에게 승진은 ‘책임의 비대칭’이 시작되는 족쇄일 뿐이다.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토요일 오전, 대한민국 오피스 워커들 사이에서는 ‘승진이 곧 성공’이라는 수십 년 된 성공 공식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야망이 없다” vs “책임만 늘고 보상은 쥐꼬리… 가성비 최악”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

김 부장 세대에게 승진은 가문의 영광이자 노후를 보장하는 ‘사다리’였다.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부장, 상무라는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렸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의 저녁 식사나 개인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한 ‘기회비용’으로 여겨졌다. “요즘 젊은 애들은 야망이 없다”는 김 부장의 한탄은, 자신이 바쳐온 충성심이 부정당하는 데서 오는 당혹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사원의 계산법은 철저히 ‘수익률(ROI)’에 기반한다.

과장, 차장으로 올라갈수록 월급은 소폭 상승하지만, 그 대가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업무 강도, 그리고 ‘정치’의 피로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판단이다.

특히 부장급들이 위에서는 임원들에게 치이고 아래에서는 후배들 눈치를 보며 고군분투하는 ‘낀 세대’의 비애를 목격한 2030에게 승진은 동경의 대상이 아닌 ‘피해야 할 재앙’에 가깝다.

“부장 되면 뭐 하나, 5년 뒤면 잘릴 텐데”… 데이터가 말하는 승진 거부권

HD현대중공업 노조는 2024년에 이어 지난해 사측과의 임금단체협약에서 승진거부권 인정을 요구했다. 뉴스1

이러한 ‘승진 기피’ 현상은 실제 통계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지난해 직장인 11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4.8%가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승진을 거부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특히 2030 세대에서는 ‘워라밸 파괴(37.1%)’와 ‘책임감에 대한 부담(32.5%)’이 승진 거부의 핵심 이유로 꼽혔다.

실제로 HD현대중공업 노조는 2024년에 이어 지난해 사측과의 임금단체협약에서 승진거부권 인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더 이상 ‘평생직장’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 직장인들은 조직 내에서의 신분 상승보다 ‘개인의 전문성’과 ‘심리적 안전거리’ 확보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승진해서 5~10년 더 버티는 것보다 적당한 직급에서 실무 능력을 유지하며 언제든 이직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것이 더 똑똑한 생존 전략이 된 셈이다.

‘야망의 시대’ 종말인가, ‘가치의 전환’인가… 최후의 승자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

자본 시장과 인사 전문가들은 이를 ‘성공 정의의 파편화’라고 분석한다.

익명을 요구한 조직관련 전문가는 “과거에는 조직이 제시하는 단일한 성공 경로(승진)를 모두가 따랐지만, 이제는 자산 형성의 수단이 다양해지면서 회사 내 직급이 주는 권위가 급격히 약해졌다”며 “승진을 거부하는 젊은 층을 단순히 ‘열정 부족’으로 치부한다면, 조직은 핵심 인재를 유지하는 데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토요일 아침, 김 부장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이 사원을 보며 혀를 찬다. 하지만 이 사원이 공부하는 것은 승진 시험이 아닌, 퇴근 후 제2의 인생을 위한 영상 편집 기술이다.

조직의 정점을 꿈꾸는 김 부장의 야망과 조직의 경계 밖에서 자유를 꿈꾸는 이 사원의 실리. 어느 쪽의 선택이 더 ‘현명한 인생 경영’이었는지는 훗날 그들의 은퇴 이후 삶이 증명할 것이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