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어머니, 이번엔 봉투가 얇아요"… '월 200' 학원비에 효도마저 사치가 된 가장들 [얼마면 돼]

어린이날에 스승의 날 눈치까지… 5월 지출 블랙홀이 된 ‘자식 사랑’ 학원비는 폭등하는데 실질 소득은 제자리, 결국 줄일 곳은 ‘부모님 용돈’뿐 5월 평균 추가 지출만 100만 원 훌쩍… 인플레이션이 빚어낸 ‘효도 사치’ 현상 얇아진 봉투 내밀며 죄송한 마음을 삼키는, 샌드위치 세대의 씁쓸한 영수증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이미지입니다

[파이낸셜뉴스] 5월의 첫 주말, 40대 직장인 H씨는 모바일 뱅킹 앱을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이날을 맞아 아들이 꼭 갖고 싶다던 20만원짜리 로봇 장난감을 하나 결제하고, 매달 고정으로 나가는 150만 원짜리 영어유치원 학원비와 미술학원, 축구센터 학원비 이체까지 마치고 나니 계좌 잔고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달력을 보니 당장 며칠 뒤가 어버이날이다. 양가 부모님 네 분께 드릴 용돈을 계산하던 H씨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여보, 물가도 많이 오르고 애들 챙길 것도 많은데… 올해 어버이날 양가 부모님 용돈은 10만 원씩만 줄여서 봉투 얇게 합시다.

어렵게 꺼낸 아내의 말에 H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지만, 평생 헌신하신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마저 줄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못내 서글프다.

13화에서는 살인적인 물가와 멈출 줄 모르는 자녀 사교육비에 치여, 기꺼이 ‘불효’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3040 샌드위치 세대의 서늘한 5월 가계부를 들여다본다.

◇ 5월이 두려운 가장들… 인플레이션이 덮친 가정의 달

어린이날 놀이공원.연합뉴스

가장들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다.

철저한 숫자의 압박이다. 평범한 40대 외벌이 가구가 5월을 무사히 넘기려면 평소보다 최소 100만 원 이상의 추가 지출을 각오해야 한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치솟는 외식 물가와 고금리로 인해 40대 가구의 ‘실질 처분가능소득(월급에서 세금, 이자 등을 빼고 실제 쓸 수 있는 돈)’은 팍팍하게 쪼그라들었다. 반면 아이들을 위해 써야 하는 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전국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기본 교습비는 124만 원을 넘겼고, 강남권은 150만 원을 훌쩍 상회한다. 여기에 셔틀버스, 원복, 급식비 등을 합치면 한 달 체감 고정비는 150만 원에서 200만 원에 육박한다.

어린이날 나들이를 위한 4인 가족 놀이공원 입장료와 식대만 20~30만 원이 우습게 깨진다.

여기에 어버이날 양가 식사 비용, 그리고 중순에 찾아오는 스승의 날을 앞두고 공식적인 선물은 드리지 못하더라도, 소소한 기프티콘과 유치원에 가져갈 간식 조공까지 챙기다 보면 가계부는 그야말로 초토화된다.

주머니 사정은 얄팍해졌는데 피할 수 없는 ‘의무 지출’은 크게 올랐으니, 가장 먼저 삭감의 칼날을 들이대는 곳이 바로 유일하게 조정이 가능한 ‘부모님 용돈’이 된 기형적인 현실이다.

◇ 샌드위치 세대의 자괴감… “애들 학원비 200만 원은 필수, 부모님 30만 원은 부담”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이미지입니다

이 잔인한 경제 지표 앞에서 3040 가장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괴감’이다.

현재의 3040 세대는 위로는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마지막 세대이자, 아래로는 자녀의 사교육에 올인하는 세대다.

내 아이가 남들에게 뒤처질까 두려워 매달 200만 원에 육박하는 학원비는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서라도 거침없이 결제하고, 비싼 메이커 장비도 기꺼이 사 입힌다. 저출산 시대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텐포켓(Ten-Pocket) 키즈’ 현상이다. 아이가 귀해진 만큼 키즈 프리미엄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있고, 한 아이에게 들어가는 고정 교육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나를 키워준 부모님께 드릴 30만 원 앞에서는 ‘고물가’와 ‘대출 이자’를 핑계 삼아 냉정한 계산기를 두드린다.

한 40대 직장인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린이날 애들 데리고 뷔페 가서 20만 원 긁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10만 원 더 부쳐드리는 건 왜 이리 부담스러운지 모르겠다. 스스로가 너무 이기적인 괴물처럼 느껴져서 씁쓸하다”는 글을 올려 수많은 가장들의 뼈아픈 공감을 샀다.

◇ 얇아진 봉투 뒤에 숨겨진 외벌이 아빠의 페이소스

결국 ‘얇은 봉투’를 내밀어야 하는 결정은 부모님이 미워서가 아니다. 그저 이 팍팍한 인플레이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가장의 처절한 생존 방어전일 뿐이다.

부모님 용돈이라도 조금 더 보태기 위해, H씨는 점심 식사 후 습관처럼 마시던 5천 원짜리 커피와 시원한 탄산음료마저 독하게 끊어버렸다. 대신 편의점에서 산 달달한 배 음료 한 캔으로 팍팍한 속을 달래며 다시 한번 은행 앱의 잔고를 확인한다.

가족을 위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마저 포기하며 버텨왔건만, 돌아오는 것은 부모님께 제대로 된 효도 한 번 못 한다는 ‘무력감’과 ‘죄송스러움’뿐이다.

어버이날을 앞둔 5월의 첫 주말. 얇아진 현금 봉투를 챙겨 들고 부모님댁으로 향하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40대 가장의 어깨가 유독 무겁게 가라앉는다.

애들 학원비 방어하랴, 치솟는 물가 견뎌내랴 기꺼이 불효자가 되기를 자처한 대한민국 가장들에게 5월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하고 슬픈 계절이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