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한 달 전까지 회의 때마다 의견을 먼저 묻던 상사가, 어느 순간부터 당신을 지목하지 않는다. 주요 프로젝트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고, 중요한 회의에서는 “이번 건은 필수 참석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온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업무는 이상하게 늘어난다. 평가는 나쁘지 않은데, 승진만 계속 미뤄진다. 버티다 지친 끝에, 결국 사직서를 내민다.
회사 기록에는 ‘자발적 퇴직’으로 남는다.
이것이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다. 직접 해고를 통보하지 않고, 승진·보상·업무 배치·소통을 조작해 직원이 스스로 떠나도록 만드는 관행이다. 법적으로는 자발적 퇴사이므로 회사는 해고 수당과 법적 리스크, 언론 노출을 모두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법은 피하고 사람을 잃는 전략이다.
미국의 최근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2025년 5월 HR 리서치 기관인 레주메 템플릿(ResumeTemplates)이 미국 기업 리더 1,12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응답 기업의 53%가 이미 조용한 해고를 시행 중이거나 연내 도입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가장 많이 쓰이는 전술은 승진·급여 인상 지연(47%), 출근일 확대 강요(42%), 복리후생 축소(32%) 순이었다. 조용한 해고를 쓰는 이유는 해고 수당 회피(34%), 법적 리스크 축소(34%), 부정적 언론 노출 방지(32%)였다. 한국에서도 재택근무 축소, 직무 재배치, 성과평가 기준 강화라는 이름 아래 비슷한 압박이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인다. 공식 감원에 따르는 비용과 시끄러움을 피하면서, 인력을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조용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큰 소음을 만든다는 점이다.
떠나는 사람은 저성과자가 아니다
조용한 해고의 첫 번째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 전술은 겉으로는 ‘문제 있는 저성과자’를 내보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먼저 떠나는 사람은 선택지가 많은 고성과자다. 시장에서 갈 곳이 있는 인재는 조직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다. 같은 설문에서 응답 기업의 77%가 “조용한 해고가 실패할 때가 있다”며 그 이유로 “(나가야 할) 직원들이 오히려 버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즉, 남기고 싶은 사람은 떠나고, 내보내고 싶은 사람은 남는 역선택이 구조적으로 일어난다.
2026년 2월, 핀테크 기업 블록(Block)의 사례는 이 현상을 공개적인 무대로 끌어올렸다. 잭 도시(Jack Dorsey) CEO는 전체 인력의 약 40%에 해당하는 4,000여 명 감축을 전격 발표했다. 회사 규모는 1만여 명에서 6,000명 아래로 줄어들게 됐다. 도시는 주주 서한에서 “우리가 만드는 인텔리전스 도구를 활용하면 더 작고 평평한 팀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더 나아가 “향후 1년 안에 대부분의 기업이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블록의 방식은 형식상 공개적인 구조조정이었으므로 조용한 해고는 아니다.
그러나 이 발표가 미국 HR 업계에 던진 충격은 조용한 해고의 구조적 배경을 드러낸다. “AI로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산업 전반에 확산되면, 많은 기업은 공개 감원이 아닌 조용한 압박을 선택한다. 공개 발표에 따르는 주가·평판·법적 리스크를 피하면서,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사티아 나델라, 제이미 다이먼 같은 경영자들도 AI로 인한 대규모 일자리 이동을 예고했다. 이 흐름이 ‘조용한 해고’의 연료가 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026년 초 한 국내 A금융사 직원의 증언은 전형적이다. 구조조정 대상이 거론된 이후 특정 팀의 업무가 폭증했고, 밤 11시까지의 야근이 일상이 됐다. 상사는 “요즘 다 이 정도는 한다”고 말했다. 평가는 갑자기 낮아졌고, 승진 심사도 미뤄졌다. 결국 자진퇴직을 선택했다. 회사 기록에는 ‘개인의 선택’으로 남는다. 법적 절차는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남은 직원들의 마음에는 다른 문장이 새겨진다. “언제든 나도 이렇게 밀려날 수 있다.” 이 한 문장이 조직의 자정능력을 갉아먹는다.
한국에서도 판례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평가 하향, 업무 과부하, 차별적 배제가 특정 그룹을 겨냥해 조직적으로 반복될 경우, 법원은 형식보다 실질을 보고 판단하는 추세다. 조용한 해고는 단기적으로 법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당해고 소송과 평판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 미국에서도 이미 원격근무 선호 직원을 대상으로 한 출근 강요가 사실상의 강제 퇴직 유도 수단이라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리더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다
조용한 해고가 가능한 이유는 간단하다. 조직 안에 이미 ‘말할 수 없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직원은 리더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고, 리더도 직원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 틈을 조용한 해고가 파고든다. 그렇다면 CEO와 리더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 숨기지 말고 정면에서 설명해라. “팀 구성을 개편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성과 기준이 높아집니다” 같은 모호한 예고는 불안만 증폭시킨다. 필요한 건 구체성이다. 경영 환경이 어떻게 변했고, 그 결과 어떤 조직 개편이 필요하며, 영향을 받는 포지션은 몇 개이고, 절차와 보상은 어떻게 구성되며, 남는 인력에 대한 재배치·재교육 지원은 무엇인지 말이다. CEO가 최소 몇 차례 직접 설명하는 자리를 가져야 한다. 직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감원 자체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성과 기준을 수치와 행동 단위로 명문화하고 일관되게 적용해라. 조용한 해고의 핵심은 기준의 불투명성이다. “성과가 부족하다”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수치에서 부족한지 “팀 문화에 맞지 않는다”고 할 때,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 했나를 답할 수 없다면, 기준은 없는 것이다. 성과 개선 계획(PIP)은 ‘해고 전 단계’가 아니라 실제 개선 기회로 설계되어야 한다.
셋째, 정직한 피드백의 문화를 만들어라. 연말 평가에서 처음 듣는 피드백이 있다면, 그 자체가 조용한 해고의 신호다. 월 1회 이상 1:1 면담을 통해 성과와 발전 과제, 다음 목표를 정기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동시에 상향 피드백 채널을 열어 “리더의 피드백이 명확한가”, “나는 리더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를 정기적으로 물어야 한다. 점수가 낮은 리더에게는 교육과 코칭이 병행되어야 한다.
조용한 해고는 조용한 조직을 만든다. 직원들은 입을 닫고, 의견을 내지 않고, 질문을 멈춘다. 위기 신호는 위로 올라오지 않고, 실수는 은폐된다. 남는 것은 생산성이 아니라 불신의 재고다. 기업은 서류상 인력을 줄였지만, 실제로는 조직의 면역력을 잃는다.
리더는 불편한 대화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대화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다. 사람을 조용히 밀어내는 것과, 정면에서 마주 보고 말하는 것. 이 선택이 단기 비용을 아끼는지는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어느 쪽이 조직을 살리는지는 분명하다.
2026년 AI와 경제 불확실성의 한복판에서, 법은 피하고 사람을 잃는 전략이 가장 비싸다는 것을 CEO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김문경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대한리더십학회 부회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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