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M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유니버설 위너호가 지난 10일 울산항에 입항하고 있다. 이 선박은 중동전쟁 이후 호르무즈 해협에 갇혀 있던 한국 선박 26척 중 유일하게 호르무즈를 빠져나왔다. (울산항만공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뉴스1 조민주 기자
17일(현지시간) 브렌트유 선물은 전장보다 0.75% 오른 배럴당 79.55달러,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0.97% 상승한 배럴당 76.79달러에 마감했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서울=뉴스1) 노민호 기자 = 미국과 이란이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에 합의하면서 국제유가는 하락세를 보이는 등 시장은 중동발 공급 충격 완화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이번 MOU에는 호르무즈 해협 통항과 관련한 ’60일 무상통항’ 조항이 포함돼 향후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협상 결과에 따라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한국의 원유 수입·공급망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60일 동안은 무료”…통행료 부과 여지 남긴 MOU
미국과 이란이 17일(현지시간) 합의한 MOU는 총 14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제5항에는 ‘MOU 서명과 동시에 이란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오가는 상선들의 안전한 통항을 위해 60일 동안에 한해 무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돼 있다.
표면적으론 전쟁으로 마비된 해상 물류망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60일이 지나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비용을 징수할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긴 것이라는 분석도 동시에 제기된다.
5항에는 ‘이란은 국제법과 연안국의 주권적 권리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의 향후 관리 및 해사 서비스 정의를 위해 오만 및 페르시아만 연안국들과 논의를 진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란과 오만 등이 해협 관리나 항행 서비스 제공을 명분으로 비용을 징수할 수 있는 근거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이란은 앞으로 60일 동안 포괄적 최종 합의를 위한 추가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만약 제5항이 ‘임시 조치’가 아닌 ‘장기적 관리 체제’로 이어질 경우 파장은 중동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공급망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MOU 타결 직후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영구적으로 통행료가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란 측 협상단 대표였던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은 국영TV 인터뷰에서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요금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며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주권적 권리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양측의 입장 차가 뚜렷한 만큼, 향후 협상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동발 해상 리스크…한국 에너지 수입 비용 변수로
호르무즈 해협은 전쟁 이전 기준,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에너지 수송로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이 들여오는 원유와 한국가스공사가 수입하는 카타르산 LNG 상당량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한국은 러우전쟁과 홍해 사태 이후 공급망 다변화가 추진됐지만 에너지 공급망만큼은 여전히 중동 의존도가 높다.
이란은 호르무즈 통행료 징수를 ‘서비스 제공에 대한 대가’라고 설명하며, 수에즈 운하 등을 사례로 들고 있다. 다만 수에즈 운하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설한 인공 운하인 반면,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 해협이라는 점에서 단순 비교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란 의회는 지난 4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주권 확립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때마침 배럴당 1달러를 부과한다는 외신 보도도 이어졌다.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적재량이 통상 200만 배럴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박 한 척당 200만 달러(약 30억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시장이 주목하는 변수는 통행료 자체보다 ‘호르무즈 프리미엄’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통행료가 배럴당 1~2달러 수준에 그칠 경우, 원유 시장이 감내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지만, 향후 해협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될 경우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블록체인 전문매체 비인크립토는 “원유시장은 실제 비용보다 공급 차질 가능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호르무즈 해협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거나 통행료 부과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시장은 다시 공급 불안 우려를 가격에 반영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정유·석유화학 영향 불가피…수출 기업도 부담
통행료 부과가 현실화될 경우 호르무즈 해협은 봉쇄는 아니지만 지속적인 비용 부담이 발생하는 일종의 ‘에너지 톨게이트’로 변모하게 된다.
국내 선사들은 이러한 비용을 운임에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중동 전쟁 이후 급등한 전쟁위험보험료가 유지될 경우 해상 운송 비용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
중동을 경유하는 각종 원자재 수송비용도 함께 오를 가능성이 있다. 정유업계와 석유화학업계가 또다시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나프타 품귀 현상을 겪은 바 있는 석유화학 업종은 원가 상승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와 반도체, 배터리 업종도 간접 영향권에 들어간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제조원가와 물류비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수출 가격 경쟁력 약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호르무즈 변수’가 계속되며 국제유가가 중동 전쟁 발발 전 가격인 배럴당 60달러 수준으로의 회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정유, 석유화학분야는 물론이고 물가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전후 복구 사업’ 통행료 악재 속 숨은 또 다른 변수
다만 전문가들은 이번 MOU에서 ‘이란 재건’ 관련 조항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제6항에는 ‘미국은 역내 파트너들과 협력해 최소 3000억 달러 규모의 구체적이고 확정된 재건 및 경제개발 계획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 교수는 “전후 복구 과정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다면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반대로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이란이 호르무즈 통행료를 재건 재원으로 활용하려 한다면 한국 경제에는 부정적 영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이번 MOU에 통행료 논의 여지를 남겨둔 배경은 재건 사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포석’일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허윤 서강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국은 향후 이란 재건 과정에서 호르무즈 해협 개방의 중요성을 활용해 동맹국과 우방국들의 참여를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며 “재건 사업 참여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면서 비용 분담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한국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통행료 자체보다 향후 재건 사업 참여 여부와 공급망 안정성 확보가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