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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도도하게 혀끝을 간질… ‘피노 누아’의 네가지 얼굴 [Weekend 와인]

8월 18일 ‘국제 피노 누아의 날’

포도껍질 얇아 기후·토양에 민감

같은 품종이라도 대륙별 매력 달라

취향따라 산지 고르는 재미 가득

우아하고 실키한 질감의 프랑스

진하고 매력적인 과실 향은 칠레

생기 있고 또렷한 산도엔 뉴질랜드

흙과 향신료의 오묘한 풍미 미국

섬세함의 기준이 된 프랑스 부르고뉴

오리건서 꽃핀 부르고뉴 양조법 미국 윌라멧 밸리

태평양의 냉기가 빚은 칠레 카사블랑카 밸리

강한 햇빛과 서늘한 기후가 공존 뉴질랜드 말보로

코노수르 와이너리 전경

사진 게티이미지뱅크·신세계L&B 제공

와인 애호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아하고 인기 있는 레드 와인 품종 중 하나로 ‘피노 누아’를 꼽는다. 매년 8월18일은 세계 각지에서 ‘국제 피노 누아의 날’로 기념되는 날이다. 피노 누아가 세계 각 대륙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다만, 한 품종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지역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같은 피노 누아라도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자란 포도와 칠레 카사블랑카 밸리, 미국 오리건, 뉴질랜드 말보로에서 자란 포도는 서로 다른 향과 질감을 드러낸다. 피노 누아는 껍질이 얇고, 송이가 조밀해 병충해와 기후 변화에 민감한 품종이다. 재배하기 까다로운 대신 포도가 자란 지역의 기후와 토양, 수확 시기와 양조 방식에 따라 와인의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비교적 서늘한 기후와 석회질 토양에서 강점을 보이는 것도 피노 누아의 특징이다. 결국 한 병의 피노 누아는 포도 품종 자체뿐 아니라 산지가 지닌 환경을 함께 기록한다.

오는 18일 국제 피노 누아의 날을 맞아 프랑스 부르고뉴를 시작으로 남미 칠레, 북미 미국, 오세아니아 뉴질랜드까지 4개 대륙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의 서로 다른 표정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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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연 기자

루이 자도 부르고뉴 피노 누아

피노 누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산지는 프랑스 부르고뉴다. 부르고뉴의 서늘한 기후와 석회암을 기반으로 한 토양은 피노 누아가 지닌 붉은 과실 향과 산도, 가늘고 섬세한 질감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각각의 마을과 포도밭에 따라 와인의 향과 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에 부르고뉴에서는 피노 누아를 토양과 빈티지의 차이를 전달하는 품종으로 여긴다.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생산자 가운데 하나인 루이 자도는 1826년 가문이 이 지역의 포도밭을 소유하기 시작한 이후 1859년 공식적으로 와인 사업을 출범했다. 현재는 부르고뉴 전역의 다양한 포도밭을 기반으로 지역별 개성을 보여주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대표 상품인 ‘루이 자도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코트 도르와 코트 샬로네즈 등 서로 다른 부르고뉴 산지의 포도를 활용한다. 코트 드 뉘 지역의 포도는 와인에 깊이와 구조감을 더하고, 코트 드 본 지역의 포도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과실 풍미를 보태면서 코트 샬로네즈의 포도로 신선함을 살려 양조한다. 잘 익은 자두와 붉은 과실 향을 중심으로 부드럽고 둥근 타닌, 실키한 질감과 중간 정도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레조낭스 윌라멧 밸리 피노 누아

미국 피노 누아를 대표하는 산지는 오리건주 윌라멧 밸리다. 북쪽에 자리한 위도와 태평양의 영향으로 캘리포니아 주요 산지보다 서늘한 기후를 지니며, 해양성 퇴적토와 화산성 토양, 바람에 실려 온 황토 등 다양한 토양이 공존한다. 이곳의 피노 누아는 붉은 체리와 크랜베리 같은 과실 향과 함께 선명한 산도, 향신료와 버섯, 숲 바닥을 연상시키는 풍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오리건의 개성과 부르고뉴의 양조 경험을 연결한 와이너리가 레조낭스다. 레조낭스는 부르고뉴의 명가 루이 자도가 프랑스 밖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와이너리다. 루이 자도는 지난 2013년 윌라멧 밸리의 레조낭스 빈야드를 인수하며 오리건에 진출했고, 부르고뉴 출신 와인메이커 기욤 라르주가 와인 양조를 맡고 있다.

대표 상품인 ‘레조낭스 윌라멧 밸리 피노 누아’는 레조낭스가 소유한 에스테이트 빈야드와 윌라멧 밸리 내 우수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를 블렌딩해 만든다. 붉은 딸기와 라즈베리, 체리 등의 과실 향에 장미와 향신료, 은은한 차와 흙의 뉘앙스가 겹쳐진다. 생기 있는 산도와 미세한 타닌, 입안에 남는 미네랄 풍미도 중요한 특징이다.

코노수르 20 배럴 피노 누아

칠레 피노 누아의 주요 산지로 꼽히는 카사블랑카 밸리는 태평양과 가까운 서늘한 해양성 산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아침 안개가 포도밭의 온도를 낮추고, 포도가 천천히 익을 수 있도록 돕는다. 칠레의 풍부한 일조량을 바탕으로 과실을 충분히 성숙시키면서도 피노 누아에 필요한 산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지역의 경쟁력이다.

카사블랑카 밸리를 대표하는 상품은 ‘코노수르 20 배럴 피노 누아’다. ’20 배럴’이라는 이름은 1996년 코노수르가 품질이 뛰어난 피노 누아를 선별해 단 20개의 오크통으로 와인을 생산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코노수르의 프리미엄 와인 철학을 상징하는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이 와인은 잘 익은 체리와 딸기, 라즈베리, 자두의 풍부한 과실 향을 중심으로 은은한 스모키 향과 가죽의 뉘앙스를 함께 보여준다. 손으로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며 프랑스산 오크를 중심으로 약 12개월간 숙성해 부드러운 타닌과 길게 이어지는 풍미를 완성한다.

부르고뉴의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참고하면서도 신대륙 특유의 농익고 선명한 과실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여러 겹의 향과 절제된 질감을 보여준다면, 코노수르 20 배럴은 보다 풍성한 과실과 유연한 질감으로 칠레 피노 누아의 개성을 표현한다.

생클레어 파이오니어 블락 14 닥터스 크릭 피노 누아

뉴질랜드 남섬 북동부에 위치한 말보로는 소비뇽 블랑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서늘한 기후를 선호하는 피노 누아의 산지로도 성장하고 있다. 말보로는 기온이 비교적 서늘하면서도 일조량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적다. 특히 남부 계곡 지역은 상대적으로 점토 함량이 높은 토양이 분포해 구조감과 깊이를 지닌 피노 누아 생산에 적합하다.

말보로 피노 누아는 라즈베리와 체리, 자두처럼 선명한 붉은 과실을 중심으로 깨끗한 산도와 고른 타닌을 보여준다. 남부 계곡에서 생산된 와인은 상대적으로 색이 짙고 무게감이 풍부하며, 향신료와 검은 과실의 풍미가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 상품인 ‘생클레어 파이오니어 블락 14 닥터스 크릭 피노 누아’는 말보로의 닥터스 크릭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만으로 만드는 싱글 빈야드 와인이다. 생클레어의 ‘파이오니어 블락 시리즈’는 말보로에서도 품질과 개성이 두드러지는 개별 포도밭을 선정해 각 구획이 지닌 테루아를 와인에 담는 프로젝트다.

신세계L&B 관계자는 “피노 누아는 어느 지역에서 자랐는지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품종”이라며 “국제 피노 누아의 날은 하나의 포도가 기후와 토양, 생산자의 선택에 따라 얼마나 다른 와인으로 완성되는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