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TV에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장군과 관련된 영화 명랑과 노량을 봤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험하게 되었을 때 거북선을 앞세우고 승전보를 올린 두 편의 영화다. 충무공의 마지막을 그린 ‘노량 죽음의 바다’는 다시금 성웅 이순신장군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재확인하는데 충분했다. 두 편의 영화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둥둥둥 북을 치면서 ‘사즉생 생즉사’의 명언이 귓전을 맴돈다. 영화를 본 이후 임진왜란과 관련된 ‘행주산성’을 찾았다.
한강 하류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는 개화산128m이 있다. 한강 건너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에는 덕양산125m이 있다. 이 산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개화산에는 강서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강 건너 덕양산에는 행주산성이 있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 중 하나다. 개화동과 행주동을 연결하는 행주대교(길이 1,460m)가 있다. 옛 행주대교는 철거될 상황인지 중간 부분이 두 동강 난 체 보전되고 있다.
하늘은 전형적인 천고마비의 가을 하늘이다. 하지만 날씨는 30도가 넘는 한 여름이다. 한강 하류 답사를 위해 수도권 전철 5호선을 이용하여 방화역까지 이동했다. 지하철은 시원한 냉방으로 한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선다. 이른 오전 시간이지만 무덥다. 오늘 답사는 개화산 강서둘레길을 답사한 후 강서한강공원을 지나 한강, 행주대교를 건너야 한다. 행주나루터에서 행주산성으로 올라가 행주산성을 답사한 후 능곡역까지 약 14km다.
지하철 출구에 있는 편의점에 들린다. 불볕더위에 만만치 않은 답사 거리, 물과 간식 등을 챙긴다. 강서근린공원에 들어서니 강서별빛우주과학관 있다. 울창한 숲이 반기지만 시원하다는 느낌이 없다. 민속놀이마당에서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팽이돌리기 등 어릴 적 추억을 담아본다. 숲길에는 건강을 위한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도록 황톳길이 조성되어 있다. 많은 시민이 걷고 있다. 물론 발을 씻을 수 있는 세족장도 마련되어 있다.
개화산으로 향한다. 경사도가 거의 없는 산책로다. 강서둘레길 산책로에는 무장애길이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오르고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는 길이다. 둘레길 곳곳에는 작은 숲길 도서관이 있어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둘레길이다. 개화산 숲을 나눔의 숲이라는 비가 서있다. 이 산 일대의 임야를 정점갑, 정덕선 두 형제가 구민의 건강과 여가활동을 위해 강서구에 기증한 산이라고 한다. 형제의 아름답고 숭고한 뜻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개화산에 걷기 좋은 산책로와 공원을 조성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기념비다.
개화산 둘레길을 돌다 보면 전망 좋은 개화산전망대와 신선바위 그리고 아라뱃길 전망대가 있다. 개화산전망대에서 술 향기에 취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김포공항과 인천 계양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라뱃길 전망대에서는 한강과 아라뱃길이 합류하는 전호대교까지 볼 수 있다. 신선바위는 개화산에 산신이 내려오는 바윗길이라고 한다. 지금도 매년 10월이면 산신제를 지내는 바위로 신성하게 보인다. 주변에는 울창한 토종 소나무 향이 그윽한 바위다.
신선바위 부근에는 미타사가 있다. 미타사는 작은 절로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절이라 한다. 미타사 석불입상이 절의 역사를 얘기한 것 같다. 미타사 위에는 개화산호국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호국공원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 1,100여 명과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충혼위령비가 조성되어 있다. 개화산에는 봉수대가 있으며 봉수대 밑에는 약사사가 있다.
개화산은 유서 깊은 산으로 원래 주룡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산이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시대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거주하다가 사후에 한 송이 꽃이 피었다 하여 개화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고려 때도 도인이 살던 곳에 절을 지어 개화사라 부르고 지금은 약사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양천팔경 중 하나인 개화사란 그림이 그 역사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강과 행주산성이 보이는 ‘치현정’이라는 정자로 가기 위해 치현산 고개를 넘는다. 옛날, 이 고개에서 꿩사냥을 많이 하였다 하여 꿩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치현정은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다. 정자에 서서 한강을 내려다 본다. 한강 건너 행주산성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볼 수 있다. 그 경치가 아름다워 겸재 정선이 그린 행호관어(행호에서 고기를 잡는 모습) 그림과 사천 이병헌의 한시에 그 풍광을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금도 치현정에서 바라보는 행주산성과 방화대교가 한 폭의 동양화다. 개화산에서 해돋이와 해넘이가 아름다운 산이다.
치현정에서 강서둘레길을 따라 강서습지공원과 강서한강공원으로 향한다. 정곡나들목 터널을 빠져나가면 한강공원길이다. 걷거나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붐빈다. 대부분 자전거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린다. 한강국토종주길이다. 안전한 보행자도로를 따라 행주대교를 향해 걷는다. 울창한 숲길로 상쾌한 길이다. ‘웃자고 타는데 죽자고 달리십니까‘라는 이색적인 구호가 눈길을 끌게 한다. 20여 분 걸으면 인천 서구 정서진과 행주대교 입구 교차로가 있다. 행주대교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행주산성을 바라보며 대교를 걷는다. 김포대교와 방화대교가 보인다.
행주대교 보행자 도로는 좁다. 자전거길과 병행하기 때문에 안전에 주의하여야 한다. 옛 행주나루터(예 모습은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돌방지구)에 도착이다. 한강과 걸어왔던 개화산과 행주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행주산성공원의 전망 좋은 행호루에 앉아 쉼을 갖는다. 잠시 공원 이곳저곳을 둘러 보는데 역사적인 흔적이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과 DMZ 평화누리길4-1구간을 따라 행주산성으로 향한다. 행주산성 정상까지는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
행주산성(사적 제56호) 대첩문에 도착했다. 행주산성에는 대첩문과 충장공 권율도원수 동상, 성무지, 토성, 충의정, 행주대첩비, 덕양정, 석성 발굴지, 대첩기념관 등이 있다. 충장사 대첩문에서 잊혀 가는 행주산성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본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의 승전지로 호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행주산성은 소나무 숲으로 울창하며 자연이 경이롭다. 도첩문을 들어서면 충장공 권율도원수 동상이 있다. 상 뒤로는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항전 모습이 재현된 부조가 있다.
부조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선조들의 항쟁정신을 되새겨본다. 잘 정리된 숲길을 따라 성문지를 지나 토성(415m)을 따라 정상 ’행주대첩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토성길은 울창한 숲의 그윽한 향이 힐링하게 한다. 충의정 앞에 도착 내려다보는 고양시 일대의 모습이 장관이다. 행주대첩비는 1963년 경기도민들의 성금으로 덕양산 정상에 세웠다고 한다. 대첩비 아래에는 선조 35년에 세웠다는 초건비가 있다. 초건비의 글씨는 한석봉이 썼으며 행주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재라고 한다.
덕양정에 앉아 한강과 주변의 검푸른 자연의 풍경을 담아 본다. 2019년 발굴되었다는 석성터까지 답사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한강 유역의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입증되었다는 설명이다. 소나무길이 울창한 홍살문을 지나면 충장공 권율도원수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가 있다. 매년 3월 14일(양력) 행주대첩이 있었던 날을 기념하여 제례를 올린다고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영정 앞에 머리 숙여 묵례를 올린다. 기념관에 잠시 들려 당시 사용하였던 무기와 전시된 자료들로 치열했던 행주대첩을 확인할 수 있다.
행주산성 하산길에 또 다른 행주산성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숲길에 행주산성과 관련된 숨은 이야기들을 걸개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밥 할머니에 관한 얘기다. 옛날 한 마을에 지혜로운 여성이 살고 있었다. 왜군이 창릉천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강 상류에서 석회를 뿌린 물이 내렸다고 한다. 하천에 하얀 물이 흐르자 왜군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물이 왜 이렇게 하얀색이냐? 이에 할머니는 조선군이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는 물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왜군은 퇴각하였다는 이야기다. 이 여인이 바로 동산동 밥 할머니라고 설명한다.
행주산성에는 돌탑 이야기도 있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사용하였으리라 생각되는 크고 작은 돌들이 출토되어 이를 돌탑을 쌓아 보전하고 있다.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음) 하루 동안 치렀던 전투라고 한다. 왜군 3만 명이 하루 동안 9차례 공격했던 행주대첩이라고 한다. 관군 2,300여 명과 의병, 승병 5천여 명과 부여자들이 참여한 대첩이다. 여자들은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까지 벌인 전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권율장군은 강화 출신이다. 선조 15년 늦은 나이(4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역사적으로 문무를 겸비한 명장이었다고 한다. 장군은 한성 수복을 목표로 행주산성에서 주둔하고 왜군과 맞서 항전한 대첩이다. 행주대첩에서 사용된 무기는 신기전과 비격전천뢰 등이다. 왜군은 1만여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고 한다. 행주대첩은 천혜의 자연환경 강과 절벽 등을 이용하여 승리한 대첩이라고 한다. 여자들이 입었던 앞치마는 석전의 공을 세워 행주치마의 유래가 된 것이다. 행주산성 답사 후 충무공과 충장공 두 분을 생각하며 행주동 꽃 재배단지를 지나 서해선 능곡역에 도착, 답사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