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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일본의 진짜 경쟁력은 제조업 현장에 있다[글로벌 리포트]

생성형 AI 경쟁서 美·中에 뒤처진 日

초정밀 제조업 기술과 데이터 앞세워

피지컬 AI 경쟁 우위 선점한다는 전략

제조부터 금융·통신·모빌리티까지

日기업 44곳 손잡고 ‘노에트라’ 출범

내년 산업 특화 기반모델 개발 목표

지난 5월 20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 ‘더 프린스 파크타워 도쿄’에서 열린 ‘히타치 피지컬 AI 데이’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기반 피지컬 AI 시연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서혜진 도쿄특파원

【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 “하드웨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드웨어 위에 지능을 올릴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지난 5월 20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 ‘더 프린스 파크타워 도쿄’에서 열린 ‘히타치 피지컬 AI 데이’. 기조연설에 나선 아베 준 히타치제작소 대표집행임원 부사장은 AI를 기업의 기술과 업무, 인재,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는 전환점이라고 규정하며 이같이 말했다. 생성형 AI가 디지털 공간의 정보를 처리하는 단계를 넘어 공장과 철도, 발전소 등 현실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행동하는 피지컬 AI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진단이었다.두 달 뒤인 지난 16일 일본 정부와 산업계는 피지컬 AI를 국가 차원의 성장 전략으로 구체화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일본을 직접 찾아 후지쓰, 화낙, 야스카와전기, 가와사키중공업 등 일본 대표 제조기업들과 피지컬 AI 협력 계획을 발표했다.

■제조업으로 AI 승부수

일본 정부 전략은 크게 세 축으로 구성된다. 먼저 AI 컴퓨팅 인프라 확보다. 경산성은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규모로 확보해 일본 기업들이 고성능 AI를 학습·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계획이다.

두 번째는 산업 특화 기반모델 개발이다. 제조와 물류, 건설 등 산업 데이터를 공동 학습시키는 국산 AI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다. 마지막은 산업 현장 적용이다. 공장 자동화와 물류, 의료, 건설, 자율이동체 등으로 AI 활용을 확대해 노동력 부족과 생산성 정체를 해결한다는 목표다. 경산성은 지난달 발표한 ‘AI·로보틱스 산업전략’에서 제조업을 비롯해 물류·건설·의료·농업·에너지 등 17개 산업을 AI 혁신 대상으로 제시했다. AI와 로보틱스 확산을 통해 2040년까지 약 370조엔(약 3394조원)의 경제효과를 창출한다는 목표다.

일본이 피지컬 AI를 국가 전략으로 내세운 것은 단순히 새로운 AI 기술을 육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과 생산성 정체를 해결하는 동시에 제조 경쟁력을 AI와 결합하려는 산업정책이다. 미국과 중국이 범용 생성형 AI 경쟁을 주도하는 사이 일본은 제조 현장에서 축적한 데이터와 로봇 기술을 앞세워 차별화된 AI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노에트라·엔비디아·제조기업 ‘일본식 AI’

이 전략을 실행하는 핵심 축은 지난 16일 공식 출범한 ‘노에트라’다. AI 스타트업이라기보다 국가 주도의 산업 AI 컨소시엄에 가까운 조직으로 소프트뱅크를 비롯해 소니그룹, 혼다, NEC,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등 44개 기업이 참여한다. 제조·금융·통신·모빌리티 등 산업 데이터를 공동 활용해 산업 특화 기반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정부는 향후 수년간 최대 1조엔(약 9조1700억원)을 투입해 AI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고 2027년 산업 특화 기반모델, 2031년 피지컬 AI 플랫폼 구축을 추진할 계획이다.

노에트라가 산업 데이터를 연결한다면 엔비디아는 피지컬 AI 구현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제공한다. 최신 GPU와 로봇 개발 플랫폼 ‘아이작’, 산업용 디지털 트윈 플랫폼 ‘옴니버스’를 공급해 제조 현장을 가상공간에서 먼저 구현·검증한 뒤 실제 공장에 적용하는 AI 학습 환경을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후지쓰는 화낙, 야스카와전기, 가와사키중공업과 공동으로 제조업 전반에서 활용할 수 있는 피지컬 AI 플랫폼을 개발한다. 서로 다른 제조사의 산업용 로봇이 하나의 AI 플랫폼에서 협업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연내 플랫폼을 공개하고 제조 현장 실증을 거쳐 물류와 의료 등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기업별 실증도 본격화하고 있다. 화낙은 AI 기반 자율 작업 기술을, 야스카와전기는 다품종 소량생산용 AI 생산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가와사키중공업은 조선소 생산라인 자동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도요타는 우븐시티에서 엔비디아 기술을 활용한 차세대 모빌리티와 교통 인프라를 실증할 예정이다.

■’하드웨어 강국’ 넘어 AI 플랫폼 국가로?

다만 제조업과 로봇 기술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이 피지컬 AI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오노 마코토 일본 국제문화회관 지경학연구소 신흥기술그룹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지금이 일본 기업들이 하드웨어를 넘어 피지컬 AI 가치사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피지컬 AI의 부가가치가 하드웨어보다 기반모델로 이동하는 가운데 일본은 미국과 중국에 비해 컴퓨팅 자원과 위험자본, 연구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제조 데이터를 경쟁력으로 전환하려면 AI 학습 환경에 대한 투자와 기업 간 데이터 공유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AI 인프라와 기반모델 구축을 추진하고 노에트라를 중심으로 산업 데이터와 글로벌 AI 기업을 연결하는 생태계 조성에 나서고 있다.

결국 일본은 생성형 AI에서 미국과 중국을 정면으로 추격하기보다 제조 경쟁력을 AI와 결합하는 길을 택했다. 제조 데이터와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피지컬 AI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실험이 노동력 부족과 생산성 정체를 돌파할 새로운 산업 모델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