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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공기 속에서 피어나는 위로, 12월에 듣는 라흐마니노프

12월 중순, 도시는 특별한 기색 없이도 속도를 늦춘다. 연말 특유의 소란은 아직 멀고, 차가운 공기만이 계절의 변화를 조용히 알릴 뿐이다. 이 시기에 클래식 애호가들이 자연스레 찾는 곡이 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중 2악장이다. 협주곡 전체가 작곡가의 재기를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계절의 정조와 가장 밀착하는 악장은 단연 2악장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을 남기기 전, 자신의 경력을 뒤흔든 실패를 경험했다.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으며 그는 긴 슬럼프에 빠졌다. 침체를 벗어난 뒤 발표한 협주곡 2번은 ‘귀환의 신호’로 받아들여졌지만, 그 중심에서 조용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2악장이다.

작품은 피아노의 단정한 아르페지오로 문을 연다. 협주곡 특유의 화려한 제시부가 아니라, 마치 숨을 고르는 듯한 서두다. 이어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이 주제를 이끈다. 선율은 과장이나 장식 없이 단정하게 흐르며, 청자는 소리의 질감이 낮아진 서늘한 공기와 마주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낭만주의의 격정과는 거리가 있다. 대신 감정의 물결을 한층씩 쌓아가는 구조가 겨울의 풍경과 닮아 있다.

특히 후반부의 전개가 인상적이다. 감정이 크게 치솟을 듯하다가도 절제된 선에서 머문다. 이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짙은 화성과 맞물려, 겨울이 품은 정서적 거리감을 섬세하게 만들어낸다. 차갑지만 냉혹하지 않고, 따뜻하지만 과도한 위로도 아니다. 말수 적은 지인이 옆에서 걸음을 맞춰주는 것처럼, 음악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청자와 나란히 걷는다.

2악장은 대중적 인지도도 높다. 드라마나 광고 등 여러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익숙함을 얻었다. 그러나 원곡의 구조를 따라가면 표면적 감정효과 너머의 세밀한 층위가 보인다. 한 음형이 다른 음형을 받쳐 올리고, 큰 동선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악장 전체를 하나의 긴 호흡으로 묶는 방식은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미학을 잘 보여준다.

12월은 누구에게나 속도를 조절할 이유가 생기는 시기다. 계절의 차가움 속에서 사색이 깊어지고, 일상의 결이 세밀하게 드러난다.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은 그 시간과 겹친다. 정적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감정, 과장보다 절제를 택한 선율은 겨울을 넘어가는 순간에 가장 가까이 놓인 음악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