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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는 아직 비어 있다"…침묵에서 정명으로, 제주4·3이 묻는 '내 이름은'

정지영 감독 작품, 염혜란 주연

영화 ‘내이름은’ 포스터.

영화 ‘내 이름은’ 보도스틸.

이재명 대통령 부부, 영화 ‘내 이름은’ 관람.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 부부, 영화 ‘내 이름은’ 감독·배우와 함께 무대 인사

[파이낸셜뉴스] 지난 15일 개봉한 제주 4.3 소재 영화 ‘내 이름은’이 개봉 첫 주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가운데, 제주 지역 문화예술인이 4·3 담론의 핵심으로 ‘정명(正名)’ 문제를 꼽았다.

5·18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 ‘광주민중항쟁’ 등을 거쳐 공식 명칭을 찾았듯, 제주 4·3 역시 어떤 이름으로 규정하고 역사에 남길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영화 ‘내 이름은’은 개인의 이름을 찾는 서사에서 출발하지만, 이름을 잃은 존재들을 다시 호명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나아가 제주 4·3 역시 ‘이름을 찾는 과정’ 위에 놓인 역사임을 환기한다.

정유진 4.3영화제 관계자 겸 설치미술 작가는 20일 “제주4·3평화공원에는 아무 글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있다”며 “아직 사건의 정확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석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이름을 찾는 일이 곧 역사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제주서 나고 자란 4050대도 “대학 가서야 접해”

제주 4·3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봉인돼 왔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박소연 화가는 “어릴 때는 4·3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한 채 자랐다”며 “제사 때 아버지와 친척들이 관련 이야기를 하다 다투던 기억 정도만 남아 있다.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것만으로도 큰 변화”라고 말했다.

제주 출신 강모 작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4·3에 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대학에 가서야 제대로 접했다”고 돌이켰다. 특히 4.3은 제주 지역 내에서도 기억의 양상이 다르다. 그는 “도심보다 외곽 마을일수록 피해가 더 크게 남아 있고, 중문 지역처럼 군·경이 주둔했던 곳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아온 경우가 많다”며 “가족과 친족, 이웃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위치가 뒤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 그만큼 사건을 바라보는 감정이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입도 9년차인 정 작가는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98년 처음으로 제주 4·3을 접했다. 그는 “대학에서 독립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를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고 돌이켰다. ‘레드헌트’는 1996년 조성봉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당시만 해도 제주4·3을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웠던 시기에 제작돼 국가보안법 논란까지 겪었던 문제작이다.

정 작가는 “당시 제주 출신 한 대학 교수에게 무작정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호되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며 “그때만 해도 관련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정 작가가 제주4.3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사회 생활을 한참한 뒤다. 그는 지난 2017년에 영상 촬영 때문에 제주에 갔다가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고 제주다크투어 등을 통해 좀 더 깊숙이 알게 됐다. 그는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과 현장을 직접 걷는 경험은 전혀 다르더라”며 “4·3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제주다크투어는 4·3 유적지와 역사 현장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속 장소를 돌아보는 ‘작별하지 않는 다크투어’도 진행 중이다.

소설 ‘순이삼촌’부터 영화 ‘내이름은’까지

1978년 나온 현기영의 ‘순이삼촌’은 제주 4·3을 최초로 다룬 중편 소설로 문학사상·역사상 의의가 큰 문학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문화예술은 제주4.3의 오랜 침묵을 깨는 중요한 매개로 작용했다.

재일 제주인 시인 김시종, 제주 시인 김경훈의 작품들이 4·3의 기억을 기록해왔고, 영화계에서는 ‘지슬’ ‘한란’, 다큐멘터리 ‘목소리들’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건을 환기시켜왔다. 202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목소리들’은 특히 네 제주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지역 미술계에서는 이젠 ‘해석’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평가다. 1993년 창립된 탐라미술인협회는 33년째 4·3 미술제를 이어오고 있는데, 사건을 알리는 데 집중했던 초기와 달리 최근에는 작가 개개인의 시선으로 4·3을 재해석하고 있다. 동시에 지역 작가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외부와 해외 작가까지 참여하며 외연이 크게 확장됐다.

정 작가는 “요즘은 ‘세대 전승’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며 “‘4·3 정감’ 프로젝트를 통해 젊은 작가들을 모집하고 있다. 제주를 비롯해 여수·순천, 대구·경산, DMZ 등지를 함께 답사하고, 워크숍과 학습 과정을 거쳐 이를 작품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귀띔했다.

이제는 역사의 이름을 찾아야 할 때

제주4·3이 점차 공적 담론으로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세 사람 모두 ‘정명(正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작가는 “이름을 정하는 일이 곧 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직결된다”며 “4·3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단순히 나뉘지 않는 복합적인 사건이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기억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확한 이름과 서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모 작가는 “저항과 항쟁의 성격이 함께 얽혀 있어 더욱 복합적”이라며 “냉전과 정치적 혼란, 지역적 억압이 축적된 결과로, 단순한 희생의 관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정명 문제의 복잡성도 짚었다.

한편 영화 ‘내 이름은’은 1만명 시민 후원자의 염원으로 제작돼 이재명 대통령 내외의 관람, 제주도의회 및 교육청의 단체 관람 등 정·관계와 문화계를 아우르는 국민적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제주 4.3 평화재단에서 진행한 공모전 당선작을 바탕으로 정지영 감독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초기 자금을 모아 어렵게 완성했다. 총 9778명의 시민이 약 4억원을 모았고, 엔딩 크레디트는 이들의 이름이 약 5분간 이어진다.

주연배우 염혜란은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저 여기 있다.

저도 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손을 드는 것 같다”며 “이 영화의 완성은 엔딩 크레디트라는 말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2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내 이름은’ 시사회ㆍ기자간담회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지빈, 정지영 감독, 염혜란, 신우빈, 최준우. 연합뉴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