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D 뮤지엄 ‘신미경 개인전’
비누로 유물 만들던 작가의 새 시도
가마에서 나온 파편으로 작품 구상
10여년에 걸친 ‘거석’ 연작 등 공개
시간과 가치에 대한 의미 되짚어봐
신미경 개인전의 도자 작품들. 바위를 닮은 조각들이 서로 다른 색과 질감, 불규칙한 윤곽을 드러낸다. 다림문화재단 제공
분홍빛과 검은빛의 덩어리들이 맞물려 서 있다. 거친 표면과 파인 자국은 땅속에 오래 묻혔던 광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재료는 흙을 빚어 구운 도자다. 신미경의 ‘거석(Megalith)’ 앞에서는 작품의 제작 시점과 겉모습에서 짐작하는 시간이 어긋난다. 새로 만든 도자 조각은 어떻게 오래된 돌처럼 보이는 걸까.
서울 마포구 AOD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신미경 개인전 ‘Becoming Stone: From the Remains’는 이 질문을 물질의 변화로 풀어낸다. 다림문화재단이 마련한 전시는 지난 16일 개막해 도자와 올해 제작한 평면 신작 등 20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비누로 유물과 고전 조각을 재현해온 작가가 재료를 넓히며 이어온 시간과 가치에 대한 탐구를 살펴보는 자리다.
■비누에서 도자로 넓힌 재료 탐구
런던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신미경은 1990년대 후반부터 역사적 유물과 문화적 상징을 비누로 옮겨왔다. 그가 만든 조각은 대리석이나 장식적인 도자기의 외양을 닮았다. 쓰임에 따라 닳고 형태가 달라지는 비누는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유물의 이미지를 흔든다.
2004년 시작한 ‘화장실 프로젝트(Toilet Project)’는 이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비누 조각을 화장실에 놓고 관람객이 직접 사용하게 했다. 손을 씻는 일상의 행위가 조각의 형태를 바꾸고, 그 흔적이 다시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재료를 넓히는 준비도 오래 이어졌다. 작가는 2014년 안식년을 계기로 도자 연구에 들어갔다. 흙은 빚는 손길을 받아들이고 가마의 열을 거치며 다른 물질로 바뀐다. 비누에서 살펴온 생성과 소멸의 문제를 새로운 제작 과정 속에서 시험할 수 있는 재료였다. 작가는 “서툰 작업이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할 때부터 10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미경의 ‘Megalithes S-040’. 거친 표면과 불규칙한 윤곽이 바위를 떠올리게 하는 도자 작품이다.
■가마 속 파편에서 찾은 새 형상
‘거석’ 연작의 구체적인 출발점은 2019년 네덜란드 도자 창작기관 EKWC에서 발견한 파편이다. 앞서 가마를 사용한 다른 작가의 대형 도자 작품이 굽는 과정에서 깨져 남은 잔해였다. 신미경은 의도한 형태를 잃은 도자에서 지질학적 사건 뒤에 남겨진 암석 같은 형상을 보았다. 실패의 흔적이 새로운 조각을 구상하는 단서가 됐다.
그는 흙을 빚고 구부리고 표면을 갈아내고 굽는 과정을 통해 오래된 광물 덩어리를 닮은 도자를 만들었다. 이를 쌓아 바위 같은 구조물로 발전시켰다. 이번 전시에는 2021년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에서 선보인 주요 작품도 포함됐다.
같은 박물관은 2017년 아시아 도자기를 비누로 재현한 그의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도자의 형상을 비누로 옮기던 작가가 이번에는 흙을 구워 돌처럼 보이는 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재료와 외양을 어긋나게 하는 방식은 이어지지만, 특정 유물을 본뜬 형태에서 출발하던 작업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 형상으로 범위를 넓혔다.
전시를 기획한 오주현 WWNN 디렉터는 전시 글에서 비누와 ‘거석’을 두고 “하나는 시간이 작품을 완성하고, 다른 하나는 작품이 시간을 선행한다”고 썼다.
서울 마포구 AOD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신미경 개인전 ‘Becoming Stone: From the Remains’ 전경. 바위를 닮은 도자 조각들이 전시장 곳곳에 배치돼 있다.
■평면에 쌓아 올린 물질과 시간
올해 제작한 ‘언노운 페인팅(Unknown Painting)’ 연작은 이러한 관심을 벽면으로 옮긴다. 회화처럼 걸린 화면에는 조형 재료인 제스모나이트와 금속 분말이 발리고 쌓였다. 특정 사물을 그린 이미지보다 재료가 겹치며 만든 형상과 흔적을 살피게 한다. 2014년부터 이어온 ‘페인팅 시리즈(Painting Series)’는 녹인 비누를 틀에 부어 섞고 굳힌 작업이다. 회화 같은 외양을 갖추면서도 두께와 향기를 지닌 물질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번 신작은 그 관심을 다른 재료의 표면으로 넓힌다.
‘거석’에서 덩어리의 윤곽과 맞물린 구조를 봤다면 평면에서는 화면 위에 쌓인 재료의 흔적을 읽게 된다. 전시 제목의 ‘Becoming Stone’은 ‘돌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흙이 도자가 되고, 도자가 오래된 돌처럼 읽히는 과정에서 재료와 이름, 사물에 부여하는 의미가 함께 달라진다.
[email protected]
장인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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