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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션 켤 땐 '잡스'였는데, 3시간 뒤엔 롤 켜고 남 탓"… 주말 날린 '갓생 호소인'들 [어른의 오답노트]

완벽한 계획표를 짜고 나면 밀려오는 알 수 없는 피로감.

행동경제학이 경고하는 ‘새출발 효과’의 함정에 빠져 이번 주말도 유튜브의 바다를 표류하는 2030들의 뼈아픈 현실 자각 타임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입니다

[파이낸셜뉴스] 금요일 밤 11시. 책상 앞에 앉아 트렌디한 생산성 툴인 ‘노션(Notion)’을 켜는 남성들의 눈빛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 못지않게 비장하다. 마우스를 기민하게 움직이며 시간 단위로 색깔까지 맞춰가며 기가 막힌 주간 계획표를 완성한다.

당장 내일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을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하겠다는 원대한 다짐이 칸칸이 채워진다.

그런데 완벽한 계획표가 완성된 바로 그 순간, 이상하게도 온몸에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밀려온다. “진을 빼며 계획을 완벽하게 짰으니, 이번 주말까지는 기분 좋게 쉬고 ‘월요일’부터 새사람으로 시작하자.”

이 달콤하고 합법적인 면죄부와 함께 자연스럽게 게임 ‘롤(LOL)’을 켜고 소환사의 협곡으로 접속한다.

밤새 연패를 거듭하며 팀원 탓을 하다 주말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이른바 ‘갓생 호소인’들의 전형적인 무한 루프다.

◇ 계획표가 주는 ‘가짜 도파민’과 새출발의 함정

왜 우리는 항상 당장의 ‘오늘’을 버리고 완벽한 ‘월요일’이라는 타이틀을 기다릴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행동경제학자 케이티 밀크먼 교수는 이를 ‘새출발 효과(Fresh Start Eff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월요일이나 매월 1일처럼 달력상의 특정한 기준점이 오면 과거의 게으른 자신과 분리되어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고 착각한다. 이 심리는 얼핏 긍정적인 동기부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 당장의 실행’을 합법적으로 미루는 가장 세련된 변명거리로 작동하기 쉽다.

더 큰 문제는 계획표를 완성하는 그 순간 뇌에서 분비되는 ‘가짜 도파민’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계획표를 시각화하는 것만으로 뇌는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과 같은 보상감을 느낀다.

계획을 짜다 지쳐 정작 실행해야 할 순간에는 게임이나 유튜브로 도피하는 이유는, 이미 뇌가 ‘성취감’을 맛보고 휴식 모드로 전환해 버렸기 때문이다.

◇ ‘작업 흥분’의 진실… 의욕은 시작해야 생긴다

“아직 동기부여가 안 됐어”, “오늘은 컨디션이 아니야”라며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심리 역시 뇌과학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밀 크레펠린이 주창한 ‘작업 흥분(Work Excitement)’ 이론에 따르면, 동기를 부여하는 뇌의 ‘측좌핵’은 가만히 앉아 결심만 할 때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일단 몸을 움직여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시작해야’ 비로소 활성화되며 도파민을 뿜어낸다. 즉, 의욕이 차올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행동을 시작해야 의욕이 따라붙는다는 역설이다.

완벽한 환경과 충만한 컨디션이 갖춰지는 타이밍은 평생 오지 않는다.

◇ 무겁고 피곤한 오늘 밤, 엉망진창으로 시작할 용기

한 주 동안 일터에서, 학교에서, 각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맞이한 금요일 밤이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과 정신적인 번아웃이 얼마나 지독한지, 소파 밖으로 발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그 무거운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일주일간 버텨내느라 이미 방전된 당신에게 지금 당장 대단한 공부를 시작하고 삶을 혁신하라는 것은 어쩌면 가혹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정말 이번만큼은 제자리걸음을 끝내고 달라지고 싶다’는 진짜 변화의 불씨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완벽한 노션 계획표와 ‘월요일부터’라는 환상부터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다.

책상을 정리할 필요도, 다이어리에 형광펜을 그을 필요도 없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책 딱 한 페이지를 대충 훑어보거나, 노트북을 켜고 자소서의 첫 문장만 엉망진창으로 끄적여보고 바로 닫아도 좋다.

피곤하고 무기력한 오늘 밤, 게임을 켜기 전 단 5분이라도 실행에 옮기는 그 ‘초라하고 서툰 첫발’이야말로 당신의 잠든 뇌를 깨우는 유일한 열쇠다.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더 이상 자책하지 말자. 삶을 바꾸는 위대한 도약은 기가 막힌 계획표 속 월요일이 아니라, 가장 지치고 힘든 바로 지금, 엉망으로 내딛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되니까.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