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다들 건강했으면"…’토지’ 박경리 머물던 ‘정릉골 달동네’ 마지막 풍경 [낮은 곳의 기록자]

[재개발로 사라지는 정릉골 달동네]

골목길에는 ‘철거’ 계단엔 잡초·풀 가득

마을버스 기사 “달동네 오르내리던 기억 오래갈 것”

지난 6일 서울 성북구 정릉골의 한 주택 앞. 낡은 계단이 재개발을 앞둔 마을 풍경을 보여준다. 사진=한승곤 기자

언덕 위에서 내려와 시장을 보던 사람들, 마을버스를 타고 골목으로 돌아가던 주민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습니다. 빈집이 늘어난 정릉골에는 낡은 우편함과 붉은 스프레이로 쓴 ‘철거’ 글씨가 남았고, 정릉시장 상인들은 오래 보던 손님들의 빈자리를 이야기합니다. 재개발을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달동네의 마지막 풍경을 살펴봤습니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언덕 위에서 내려오던 분들, 이제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6일 서울 성북구 정릉시장 인근에서 만난 60대 주민 A씨는 정릉골 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서 장을 본 뒤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오르던 사람들, 손수레를 끌고 천천히 골목을 내려오던 노인들이 최근 부쩍 줄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예전에는 시장에서 장 보고 버스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늘 있었다”며 “요즘은 그 자리가 비어 보일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재개발을 하면 동네가 좋아진다고는 하지만, 살던 사람들이 흩어지는 건 아쉽다”고 털어놨다.

정릉골은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거주지다. 정릉시장과 정릉천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낮은 집들이 이어진다. 이 마을은 1960-1970년대 도심 정비 과정에서 거처를 잃은 사람들이 산비탈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며 형성된 달동네로 알려져 있다.

정릉골은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가 생전 머물렀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북구 보국문로29가길 일대 박경리 가옥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박 작가는 1965년부터 1980년 원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정릉골 일대에 거주했고, ‘토지’ 1-3권이 이곳에서 집필됐다.

달동네 비탈길에 남은 마을버스 정류소

정릉골의 마을버스 정류소. 정류소 주변 담장에는 잡초와 넝쿨이 자라 있었다. 사진=한승곤 기자

정릉골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먼저 보인 것은 노란색 ‘마을버스 정류소’ 표지판이었다. 이곳 집 담장에는 넝쿨이 내려와 있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는 주민들이 떠난 집들이 이어졌다. 일부 대문에는 출입금지 안내문이 붙었고, 벽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쓴 ‘철거’ 글씨가 남아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오래된 집 옆에는 냉장고와 폐가구가 쌓여 있었고, 풀은 계단과 담벼락 틈까지 자라 있었다. 한쪽 길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고, 다른 길은 급한 경사로 아래 시장 쪽까지 이어졌다. 집 앞 주소판과 낡은 우편함은 그대로였지만, 생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릉시장 인근에서 만난 70대 주민 B씨는 “여기 길이 힘들어도 오래 산 사람들은 다 자기 집처럼 알고 다녔다”고 했다. 그는 “눈 오면 서로 쓸어주고, 비 오면 물 내려가는 데 막힌 거 없는지 봤다”며 “이제는 그런 사람도 안 남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C씨는 “빈집이 많아지니까 밤에는 더 조용하다”며 “예전에는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사람 말소리도 들렸는데 지금은 불 꺼진 집이 많다”고 했다.

정릉골구역은 2003년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된 뒤 2012년 정비구역 지정, 2017년 조합 설립을 거쳤다. 2021년 12월 사업시행인가를 받았고, 2024년 1월 관리처분인가 이후 이주 절차가 본격화됐다. 한때 120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이 자리에는 1411세대 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지난 7월에는 정릉골을 기록한 영화 상영회도 열렸다. 마을이 사라지기 전, 주민과 골목의 기억을 남기려는 자리였다.

달동네서 마주치던 사람들…”다들 건강했으면 좋겠다”

정릉골 골목. 벽면에는 철거 표시가 남아 있고, 좁은 계단길 양옆으로 잡초가 자라 있다. 사진=한승곤 기자

정릉시장 상인들은 이주가 시작된 뒤 정릉골 주민들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했다. 60대 상인 D씨는 “정릉골 분들은 많이 사지는 않아도 자주 왔다”며 “두부 하나, 채소 조금 사 가는 어르신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얼굴 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상인도 “새 집이 들어오면 다른 손님이 오겠지만, 오래 봤던 손님하고는 다르다”고 말했다.

정릉골 주민들은 시장과 마을버스를 생활 동선처럼 이용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와 장을 보고, 약국과 슈퍼를 들른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마을버스 기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정릉골 주민들을 오래 봐서 누가 누군지 다 알고 있는데 이주로 못 본다니 아쉽다”고 했다. 버스 노선이 사라지거나 바뀔 가능성을 묻자 그는 “모르죠. 저희는 그냥 노선대로 다니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달동네 다니면서 운전했던 기억은 오래갈 것 같아요. 다들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릉골 언덕길을 마을버스가 지나고 있다. 해당 노선은 재개발에 따라 노선이 달라질 수 있다. 마을버스 기사는 달동네 주민들에 대해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사진=한승곤 기자

진진한 삶의 이야기를 활자로 기록합니다. 투박하더라도 현장에서 주워 담은 말들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골목과 시장, 누군가의 일터에서, 우리가 지나쳐온 평범한 하루의 기록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낮은 곳의 기록자]를 편하게 받아보시려면, 기자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email protected]

한승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