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남긴 발전설비 불균형이 부른 77년 전 그날의 정전
태양광 3.1GW, 1년 만에 늘어난 양이 해방 당시 전체 설비의 절반
발전 인프라는 갖췄는데, 그 발전소를 채울 원료는 여전히 남의 것
제미나이.
[파이낸셜뉴스]1948년 5월 14일 정오, 남한의 전기가 일제히 끊겼다. 도심을 달리던 노면전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공장들은 가동을 중단했다. 마침 모내기철과 겹쳐 관개용 전력 공급까지 끊기면서 그해 벼농사는 쌀 55만석 넘게 수확이 줄어들었다. 발전설비 대부분이 38선 이북에 있었던 탓에, 광복을 맞은 지 3년도 안 된 시점에 남한은 전기 없는 나라가 됐다. 77년이 지난 지금, 발전소는 더 이상 남의 손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발전소를 돌리는 에너지원의 94%는 여전히 국경 너머에서 온다. 전력망의 자립은 이뤘지만, 에너지원의 자립이라는 광복의 마지막 페이지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서인천복합화력발전소 굴뚝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가 남긴 불균형, 광복이 드러낸 약점
이른바 ‘5·14 단전’ 사건이다. 북한인민위원회가 요금 지불 문제를 구실 삼아 남한에 공급하던 전력을 일방적으로 끊었는데, 실제로는 그해 5월 10일 치러진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컸다는 게 정설이다. 이 사건이 남한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개마고원과 압록강 일대에 부전강(20만kW)·장진강(33만kW)·허천강(35만kW)·수풍(60만kW) 등 대형 수력발전소를 잇달아 지었는데, 이는 북부 지역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해방 당시 한반도 전체 발전설비의 90% 이상이 38선 이북에 몰려 있었고, 남한의 발전설비 비중은 8%인 7만9500kW에 그쳤다. 광복은 정치적 주권을 되찾은 사건이었지만, 전력만큼은 여전히 남의 손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해방 직후에도 한동안 북측 전기가 남쪽으로 공급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전기 요금의 지불 방법과 액수 산정을 둘러싸고 남북이 계속 대립했고, 남한이 북한에 지불한 요금은 청구액의 35%에 불과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치러지자, 북측은 나흘 뒤인 14일 정오를 기해 예고 없이 송전을 끊어버렸다. 3면이 바다인 남한은 외부에서 대체 전력을 끌어올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단전 이후 미군정은 발전용 함정을 인천항에 정박시켜 비상 전력을 공급하는 등 응급 대응에 나서야 했다.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 3호기(왼쪽)와 4호기(오른쪽) 모습. 연합뉴스.
발전 인프라, 단전 시기 대비 680배
이후 대한민국은 화력·원자력·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를 자체적으로 늘려가며, 발전 인프라 측면에서는 완전한 자립을 이뤘다. 1960년대 경제개발 계획과 함께 화력발전소가 잇달아 들어섰고, 1978년에는 국내 최초 상업 원전인 고리 1호기가 가동을 시작했다. 이후 원전은 반세기 가까이 한국 전력 공급의 한 축을 담당해왔고, 2000년대 이후로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도 빠르게 늘었다. 전력통계정보시스템(EPSIS) 집계를 보면 국내 원자력 발전설비만 26기, 26.1GW에 이르고, 유연탄(석탄) 발전설비는 37.7GW로 전체 발전설비의 27.7%를 차지한다. 이를 근거로 역산하면 국내 총 발전설비 용량은 136GW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5·14 단전 당시 남한 전체 발전설비가 20만kW(0.2GW)에도 못 미쳤던 것과 비교하면 680배가 넘는 규모다. 태양광 발전설비만 해도 지난해 한 해에만 3.1GW가 새로 늘었는데, 이는 77년 전 남한 전체 발전설비의 15배에 이르는 양이 단 1년 만에 태양광 한 부문에서 추가된 셈이다. 원자력발전소 수십 기와 대형 화력발전소, 전국 각지의 태양광·풍력 설비가 촘촘히 들어섰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원전 운영국이자 반도체 등 전력 다소비 산업의 세계적 생산기지로 성장했다. 이제는 반대로 남는 전력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고, 최근에는 오히려 AI·반도체 산업발 전력 수요를 어떻게 감당할지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정부가 최근 내건 ‘전기국가’ 구상도 이런 자신감의 연장선에 있다. 발전설비 하나만 놓고 보면, 77년 전 전기가 끊겨 전차가 멈추던 나라와 지금의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다.
해남 재생복합단지 태양광 조감도. 뉴시스
에너지원 광복은 여전히 진행형
문제는 발전소를 돌리는 에너지원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 통계를 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4%에 이른다. 이 수치는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90년 88.7% 이후 30년 넘게 90% 안팎을 벗어난 적이 없고, 2001년에는 98%까지 치솟기도 했다. 1차 에너지 공급에서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비중은 80.5%에 달하는데, 석유와 가스는 사실상 전량 해외에서 들여오고, 발전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원자력조차 연료인 우라늄을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발전소는 국내에 있지만 그 발전소를 돌리는 에너지원은 여전히 국경 너머에서 온다는 뜻이다. 원유는 중동 지역 의존도가 여전히 높고, 액화천연가스(LNG)는 호주·카타르·미국 등 소수 국가에서 장기계약으로 기댄다. 5·14 단전이 ‘전력망’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취약점은 ‘에너지원’의 문제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비슷하다. 재생에너지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태양광 패널의 핵심 소재인 폴리실리콘·웨이퍼와 풍력발전기용 영구자석 희토류 모두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화석연료를 벗어나려는 에너지 전환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원료 의존을 낳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정부가 강조하는 재생에너지 100GW 확대, 신규 원전·SMR 도입, 우라늄·핵심광물 공급망 다변화는 단순한 산업 진흥책이 아니라 에너지원 자체의 자립도를 높이려는 시도다. 오일쇼크 이후의 원자력 도입, 1980~90년대 해외 유전·가스전 지분 투자, 최근의 SMR 국산화까지 한국의 에너지 정책사 자체가 이런 자립 시도의 연속이었지만, 정작 에너지원 수입의존도는 30년 넘게 90%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얼마나 구조적이고 풀기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77년 전 남의 손에 있던 것이 발전소였다면, 지금 남의 손에 있는 것은 그 발전소를 채울 원료다.
기후·환경과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입니다. 에너지의 생산 방식에 따라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거나, 반대로 기후나 환경의 변화가 에너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줍니다.
[이유범의 에코&에너지]
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 기후·환경 및 에너지 이슈를 들고 매주 토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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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