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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파 공포가 멈춰 세운 송전탑, 근거는 ‘2B등급’뿐[이유범의 에코&에너지]

발암등급 2B는 ‘위험도’가 아닌 ‘가능성’의 척도

상관관계는 확인됐지만 인과관계는 20년째 못 찾아

근거 약한 공포가 150개월 송전망을 붙잡아

송전탑 반대 전국 대책위 회원들이 4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용인 산단·송전선로 전면 재검토와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 촉구를 위한 전국행동 3.4 궐기 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뉴스1

[파이낸셜뉴스]동해안-신가평 초고압직류송전(HVDC) 사업은 착공까지 88개월이 걸렸고,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150개월이 지연됐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측의 핵심 명분 중 하나는 ‘전자파가 소아백혈병을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국제암연구소(IARC)가 극저주파 자계를 발암등급 2B로 분류한 사실이 근거로 인용되지만, 이 분류는 위험의 크기가 아니라 가능성의 유무를 나타내는 척도이며 후속 연구들은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 과학계의 지적이다.

제미나이.

발암물질 2B등급, 김치·커피와 같은 급

송전선로에서 발생하는 것은 ‘극저주파(ELF) 자계’로, 흔히 위험하다고 알려진 자외선·엑스레이와는 종류가 다르다. 자외선·엑스레이는 에너지가 강해 몸속 원자 구조를 직접 파괴하는 ‘전리방사선’이고 유해성이 이미 입증돼 있다. 반면 극저주파 자계는 에너지가 훨씬 약한 ‘비전리 방사선’에 속해, 세포나 유전자를 직접 파괴할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 물리학계의 대체적인 설명이다.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2002년 극저주파 자계를 발암등급 2B, 즉 ‘발암 가능성이 있는 물질군’으로 분류했다. 같은 등급에는 절임채소, 커피, 고사리 등도 포함돼 있다. 발암물질로 지정됐다는 사실 자체가 곧 강한 위험을 뜻하지는 않는다. IARC의 등급 체계는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류하는 것이지, 실제 위험도를 계량한 지표가 아니라는 얘기다.

분류의 근거가 된 것은 1979년 미국에서 시작된 역학연구다. 낸시 위스하이머는 송변전소 주변 어린이의 소아백혈병 발병률이 2.29배 높다는 분석을 내놓았고, 1992년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페이칭 보고서를 통해 송전선 인근 어린이의 백혈병 발병률이 특정 자계 노출 수준 이상에서 2.7~3.8배 높다고 발표했다. 스웨덴 정부는 이를 근거로 주택가 송전탑을 대대적으로 철거하기도 했다. 이후 IARC가 2B등급의 핵심 근거로 삼은 것은 2000년 스웨덴 역학자 안데르스 알봄이 9개국 연구를 취합한 통합분석으로, 0.4 마이크로테슬라(μT) 이상의 높은 자계에 지속 노출된 어린이의 백혈병 위험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다는 결과였다. 다만 그런 고농도 노출에 해당하는 인구는 전체의 1% 안팎에 불과했고, 노출 수준이 낮아질수록 위험도가 비례해 감소하는 용량-반응 관계는 뚜렷하지 않았다. 또 소아백혈병 자체가 매우 드문 질환이어서, 상대위험도가 몇 배 높아진다 해도 실제 발병 확률로 환산한 절대적 증가폭은 크지 않다는 게 역학자들의 해석이다.

상관관계는 있었지만, 인과관계는 못 찾았다

이후 진행된 다수의 후속 연구와 WHO 주관 국제공동연구에서는 전자파 노출과 소아백혈병 사이의 일관된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 초기 연구의 통계적 상관관계를 설명할 생물학적 기전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환경보건과학연구소(NIEHS)도 1999년 의회 보고서에서 극저주파 자계의 발암 가능성 근거를 ‘약하다(weak)’고 평가했고, 관찰된 상관관계가 주거 밀집도·교통량 등 다른 환경 요인이나 연구 설계상의 편향에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세계보건기구(WHO) 가이드라인 역시 극저주파 자계와 소아백혈병의 연관성 근거가 미약하며, 노출을 줄인다고 해서 건강에 실질적 효과가 있는지도 불투명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WHO는 전력설비 수준의 낮은 자계 노출이 인체에 영향을 준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한국은 국제비전리복사보호위원회(ICNIRP)의 일반인 노출 기준 83.3μT를 준용해 산업부 고시로 관리하는데, 이는 국제 권고기준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며 실제 송전선로 인근 측정값은 대부분 이 기준을 크게 밑돈다. 다만 불확실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어서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는 신설 송전선로 인근 학교·병원에 국제기준보다 훨씬 낮은 1μT를 목표치로 적용하고 있다. 다만 기존에 설치된 송전탑 인근 주택에는 이 강화된 기준이 소급되지 않고 국제 권고기준이 그대로 적용된다.

하남시 동서울 변전소 전경. 뉴시스

근거 약한 공포에 송전탑 건설만 지연

전자파 공포가 실제로 멈춰 세운 사업은 한둘이 아니다. 동해안-수도권 HVDC 2단계 사업은 종착점인 동서울변전소 증설을 하남시가 불허하면서 행정심판까지 갔다. 인근 감일신도시 주민들이 전자파 유해성을 이유로 사업설명회를 무산시키고 전면 백지화 서명 1만 2000여 명분을 제출한 결과다. 한전은 최인접 아파트 정문의 실측 전자파가 0.02μT로 편의점 냉장고(0.12μT)보다 낮다고 반박했지만, 애초 2019년이던 준공 목표는 2025~2026년을 거쳐 최근에는 2029년까지 밀렸다. 정부도 지난해 5월 시민단체와 주민 반발을 이유로 전국 27개 송전선로의 입지 선정 절차를 한 달간 전면 보류했는데, 반대 논리에는 전자파 유해성 주장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사이 전력 수요는 더 가파르게 늘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2029년까지 새로 들어설 데이터센터 732곳에서 최대 49GW의 추가 전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현재 국내 전력 공급 능력은 110GW 안팎에 불과하다. 발전소를 아무리 늘려도 송전망이 갖춰지지 않으면 전력은 필요한 곳에 닿지 못한다. 송전망 지연 하나하나가 곧 산업 경쟁력의 손실로 이어진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출처=연합뉴스)

진짜 문제는 전자파가 아니라 불신

국내에서 전자파 유해성 논란이 가장 크게 불거진 계기는 2008년 경남 밀양 송전탑 사태였다. 한국전력이 765kV 고압 송전선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고, 반대 측은 전자파가 백혈병을 유발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는 부족했다. 대신 정부와 한전이 주민과의 소통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당시 갈등은 전자파 문제라기보다 보상 협상 방식과 절차적 정당성을 둘러싼 신뢰의 문제였다는 평가가 많다.

즉 전자파 논쟁이 커진 데는 과학적 불확실성보다 사업 추진 절차에 대한 불신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의 평가다. 최근 서남해 345kV 송전선로 갈등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전자파 유해성 자체보다, 주민 참여 없이 진행되는 입지 선정과 불충분한 보상 체계가 반발의 실질적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전자파가 발암 가능성이 있는 물질군으로 분류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예방적 판단이지 인과관계가 입증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불확실성이 수개월, 길게는 150개월 단위의 사업 지연을 정당화할 만큼 확립된 위험은 아니라는 게 국내외 연구가 가리키는 지점이다. 관건은 정부와 사업자가 불확실성을 얼마나 투명하게 설명하고 주민 참여를 얼마나 실질적으로 보장하느냐다. 반도체·AI발 전력 수요가 눈앞에 닥친 지금, 근거가 약한 공포로 인한 지연을 최소화하는 것 역시 에너지 안보의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후·환경과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입니다. 에너지의 생산 방식에 따라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거나, 반대로 기후나 환경의 변화가 에너지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줍니다.

[이유범의 에코&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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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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