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적 투자지원’ 베트남 틈새 공략
필리핀, 국가 경제구조 고도화나서
소비·서비스업 벗어나 제조업 육성
마르코스 정권 역대급 행보 주목
세제 혜택 최대 27년 연장 ‘파격’
韓기업 현지 생산기지 증설 추진
【파이낸셜뉴스 마닐라(필리핀)=김준석 특파원】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내 투자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아세안의 대표 제조업 기지인 베트남이 글로벌 최저한세 도입 이후 선별적 투자 지원으로 노선을 선회하자 필리핀이 그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베트남에서 혜택이 축소된 다국적기업들을 겨냥해 맞춤형 세제 개편을 단행하며 적극적인 유치전에 나선 것이다.
18일 현지 정부에 따르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봉봉) 행정부는 단순한 외국인 투자 유치를 넘어 제조업 기반의 전면적인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 소비·서비스업(IT-BPM)과 해외 이주 노동자(OFW)의 송금에 의존해 온 전통적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 첨단 제조업과 에너지·디지털 산업을 국가 핵심 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에 발맞춰 한국 기업들도 반도체와 조선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필리핀 내 생산기지를 잇달아 확대하는 추세다.
■반도체부터 조선까지… 필리핀에 눈 돌리는 한국 기업
최근 마닐라 현지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필리핀에 투자한 한국 기업 대부분이 현지 경영 환경에 만족하며 확장·증설에 나서고 있다”며 “베트남보다 저렴한 임금과 풍부한 인센티브 덕분에 관심을 두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특히 베트남이 글로벌 최저한세 도입 후 첨단산업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베트남 정부가 비(非)첨단산업으로 분류한 중공업·경공업 진출 기업들이 필리핀으로 눈을 돌리는 사례가 부쩍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필리핀 내 한국 기업의 투자는 반도체와 조선 분야가 두드러진다. 1970년대 한진중공업의 민다나오섬 도로공사 수주로 필리핀 진출의 물꼬가 트였고, 1997년 삼성전기가 칼람바 공단에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생산기지를 건설하며 탄력이 붙었다. 이는 삼성그룹이 외환위기(IMF) 체제 이후 단행한 첫 대규모 해외 투자였다. 이어 2010년대에는 삼성전자 메모리반도체 협력사인 SFA반도체가 둥지를 틀었다.
2020년대 들어서는 조선업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수빅 조선소를 유지·보수·정비(MRO)뿐만 아니라 선박 건조에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필리핀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동맹국으로서, 수빅만을 통해 미군 함정 MRO 사업까지 수주할 수 있다는 독보적인 이점을 지닌다. 이 덕분에 필리핀은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과 아태지역을 잇는 핵심 전략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양국의 협력은 반도체·조선을 넘어 첨단 IT 분야로 확장될 전망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3월 이재명 대통령의 필리핀 국빈 방문 당시 자국의 디지털 주권 확보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소버린 AI(자국 문화와 인프라에 최적화된 독자적 인공지능)’ 분야의 협력 확대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양국 간 물밑 협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세제 혜택 넘어 전략산업 지원…투자 유치 손질
필리핀 정부는 지금이 제조업 중심 경제로 체질을 전환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또 다른 현지 관계자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제조업 기반 확대를 위해 필리핀 역대 정권 중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관광·서비스업과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해외 이주 노동자(OFW) 송금에만 의존해서는 국가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실제로 필리핀 정부를 접촉해 보면 최근 베트남 등지에서 혜택이 줄어든 봉제·가공 등 전통 제조업 유치에도 공을 들이는 등 제조업 기반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제조업 부흥책의 최전선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핵심 투자 유치 법안인 ‘CREATE MORE법(RA 12066)’이 있다. 이 법은 기업이 비용 추가 공제 방식을 선택할 경우 적용되는 법인세율을 기존 25%에서 20%로 대폭 인하하고, 세제 혜택 기간을 최대 27년까지 연장하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필리핀 투자 유치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히던 비싼 전기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제조업체의 전력 비용 공제율을 100%로 확대했으며, 외국인 투자자의 장기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토지 임대 기간을 최대 99년까지 보장한다. 삼성전기 필리핀 법인의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공장 증설 역시 이 법의 직접적인 인센티브 수혜 사례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 필리핀 정부는 올해 전략적 투자 우선계획(SIPP)을 고도화 해 반도체 후공정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AI), 데이터 과학, 원자력 등 첨단 기술 분야로 투자를 유도하며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공에 나서고 있다.
한편, 한국 기업들의 움직임도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필리핀 통계청(PSA)의 최신 발표에 따르면, 2026년 1·4분기 필리핀의 전체 외국인투자 승인액은 426억4000만페소(약 1조4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52.3% 급증했다. 이 중 한국은 253억7000만페소(약 6166억원)를 기록해 전체 승인 투자액의 59.5%를 차지했다. 싱가포르와 중국 등을 제치고 당당히 필리핀의 최대 투자국으로 깜짝 올라섰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한국의 투자 승인액이 105.3%나 폭증한 수치로, 아세안 내 새로운 ‘제조업 전초기지’로서 필리핀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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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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