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SMR 공약 논란으로 본 개념 혼선
RE100은 원자력을 인정하지 않아
첨단산업단지 전력수요를 위해 원전 포함
국제 기준과 지자체 계획의 온도차
여수국가산단 전경. 뉴스1
[파이낸셜뉴스] 지난 5월 여수 지역 환경단체가 여수시장·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후보의 선거 공약을 문제 삼고 나섰다. 소형모듈원전(SMR)을 접목한 ‘RE100 산단’을 만들겠다는 공약이었다. 환경운동연합은 RE100이 기업이 쓰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개념이고, 재생에너지에는 태양광·풍력처럼 자연적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만 해당하며 원자력은 애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책 협약 자체가 개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 정치권에서 벌어진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은 전국 곳곳에서 추진 중인 ‘RE100 산단’ 정책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혼선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제미나이.
원자력은 RE100이 아니다
2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RE100은 국제 비영리단체 클라이밋그룹이 운영하는 민간 캠페인으로, 기업이 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고 선언하는 자발적 이니셔티브다. 여기서 재생에너지는 태양광, 풍력, 수력, 지열 등으로 한정된다. 원자력발전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지만 ‘재생’되는 에너지원이 아니기 때문에 RE100의 인정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빠진다. 이 구분과 별도로 정부와 산업계 일각에서는 원자력·청정수소·탄소포집저장(CCS) 등을 포괄하는 ‘무탄소에너지(CFE)’ 개념을 함께 쓰고 있다. RE100이 수단을 재생에너지로 못 박은 개념이라면, CFE는 목표(탄소 배출 저감)를 중심에 두고 원자력까지 수단에 포함시키는 더 넓은 개념이다. 문제는 이 두 개념이 정책 현장에서 종종 뒤섞여 쓰인다는 데 있다. ‘무탄소’라는 결과만 보면 원자력도 재생에너지도 같은 편처럼 보이지만, 정작 RE100을 요구하는 해외 원청기업이나 국제 이니셔티브는 원자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수 사례처럼 지자체가 ‘RE100 산단’이라는 이름에 SMR을 끼워 넣는 순간, 그 산단에 입주해도 정작 수출기업이 필요로 하는 RE100 인증 요건은 충족하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국제 RE100 이니셔티브는 인정 기준을 오히려 더 엄격하게 좁혀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지난해 4월에는 암모니아와 석탄을 함께 태우는 혼소발전까지 기술기준에서 제외해, 그나마 무탄소 에너지 쪽에 가깝다고 여겨지던 그린암모니아의 입지마저 좁아졌다. 원자력은 이런 논의에서 아예 검토 대상으로도 오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 전기산업엑스포를 찾은 관람객이 소형모듈원자로(i-SMR)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지자체는 왜 원전을 끼워 넣나
그럼에도 지자체와 정치권이 원자력을 끌어들이려는 유인은 뚜렷하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만으로 반도체·이차전지처럼 전력 소비가 큰 첨단산업단지의 수요를 감당하기가 현실적으로 벅차기 때문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같은 업종은 광업·비철금속 등 전통 산업에 비해 전력 의존도가 최대 8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과 상대적으로 높은 발전단가, 계통 접속 지연 문제까지 겹치면서,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전원을 확보하려는 지자체 입장에서는 인근의 원전이나 SMR을 산단 전력 공급원에 포함시키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여수 사례에서 문제가 된 공약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산단의 실제 목적, 즉 해외 바이어의 RE100 요구에 대응해 수출 경쟁력을 지키겠다는 목적과는 어긋난다. 원자력을 섞은 산단은 국내 탄소중립 목표 달성에는 기여할 수 있어도, RE100이라는 국제 기준을 충족시키지는 못하는 ‘이름만 RE100’인 산단이 될 위험이 있다. 실제로 현재 추진되는 RE100 산단 후보지들의 접근 방식도 제각각이다. 새만금은 태양광·해상풍력 등 순수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충에 집중하는 모델을 취하고 있는 반면, 순천은 RE100 반도체 유치 단지를 표방하면서도 지역 내 원전 인접이라는 입지 조건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같은 ‘RE100 산단’이라는 이름 아래 지역마다 실제 에너지원 구성 방침이 다르게 흘러갈 경우, 향후 입주기업이 산단별로 RE100 인증 가능 여부를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군산 수상 태양광 발전소.뉴시스
특별법 명칭 변화가 말해주는 것
이 개념적 혼선을 의식한 듯, 정부가 준비 중인 관련 특별법의 이름도 변화를 겪고 있다. 애초 ‘산업부·국토부 공동 TF’가 논의를 시작할 때는 ‘RE100 산업단지 특별법’ 또는 ‘RE100 산단 조성 특별법’이라는 이름이 통용됐지만, 최근에는 ‘재생에너지 자립도시 특별법’이라는 명칭으로 추진되고 있다. 내년 3월 제정을 목표로 하는 이 법은 새만금을 국가대표 모델로 삼아 재생에너지 공급 목표를 10GW까지 확대하고, 태양광 발전단지와 전력계통선로 등 인프라를 단계적으로 구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 명칭에서 ‘RE100’을 빼고 ‘재생에너지’를 명시한 것은, 이름 자체에서부터 원자력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다만 법안이 여러 지자체·부처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명칭과 세부 내용이 계속 바뀌어온 만큼, 최종안에서 무탄소에너지원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할지는 아직 유동적이다.
이 논쟁을 개념 정의 다툼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실제로 RE100을 선언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현대차그룹 등은 협력사에도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는 추세다. 이들 기업이 입주할 산단이 ‘재생에너지 100%’라는 이름을 걸고도 실제로는 원자력 전력을 상당 부분 쓰는 구조라면, 해외 거래처의 RE100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산단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재생에너지만으로 산단 전력을 감당하려면 발전단가 부담과 계통 인프라 구축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정부가 얼마나 뒷받침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결국 ‘RE100 산단에 원자력을 넣을 것이냐’는 질문은 에너지원 구성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이 산단을 국내용 탄소중립 실적으로 만들 것인지, 해외 수출기업이 실제로 쓸 수 있는 국제 기준 충족형 산단으로 만들 것인지를 가르는 방향성의 문제다. 내년 3월로 예정된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이 방향성이 어떻게 정리되는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 특별법 명칭에서 ‘RE100’을 빼고 ‘재생에너지’를 명시하려는 흐름이 실제 법 조문의 에너지원 정의 조항까지 이어질지, 아니면 지역별 특례 형태로 원자력 활용의 문이 다시 열릴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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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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