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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 걸렸수다" 기록 못한 그날의 증언, 스크린에 새기다

현대사 비극 다룬 영화 줄줄이

제주 4·3 사건 꺼낸 ‘내 이름은’

국가폭력에 의해 사라진 존재들

개인의 이야기 통해 사회를 저격

“이름 찾는 일이 역사 인식의 시작”

가자지구 현실 ‘힌드의 목소리’

구조 기다리다 끝내 희생된 소녀

실제 통화 목소리 생생하게 담겨

“잔인한 장면 없이도 매우 잔인”

영화 ‘내 이름은’.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

영화 ‘힌드의 목소리. 찬란 제공

제주 4·3을 소재로 한 ‘현역 최고령’ 정지영 감독(79)의 ‘내 이름은’부터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상기시키는 ‘힌드의 목소리’까지 한국 현대사와 세계 전쟁의 비극이 스크린에 소환됐다. 오는 22일에는 2024년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한 이명세 감독(68)의 다큐멘터리 ‘란 12.3’이 개봉한다.

■제주 4.3 비극 다룬 ‘내 이름은’

‘내 이름은’은 1949년 제주의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가는 어머니 ‘정순’과 촌스러운 이름을 바꾸고 싶은 그의 18세 아들 ‘영옥’의 이야기다. 작품은 1998년과 1949년을 교차시키며 교실 폭력과 국가 폭력을 병치한다. 영옥의 반에 전학 온 경태는 반장 선거를 이용해 교실 권력을 재편하고, 정순은 정신과 치료를 통해 봉인된 과거와 마주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제주 어멍을 연기했던 염혜란은 지난 13일 인터뷰에서 “개인적 공간이었던 제주가 이번에는 역사적 공간으로 다가왔다”며 “아름다운 풍경 이면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됐고 그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더 슬프게 느껴졌다”고 돌이켰다.

염혜란은 이 작품을 준비하며 제주 4·3 증언집을 통해 “그분들의 언어로 육성을 듣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또 한강 소설의 ‘작별하지 않는다’ 서문을 읽고 받은 충격도 언급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에 있던 5·18 기록을 담은 책이 떠올랐다. 그때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나 역시 그 역사적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초기 자금을 모았다. 9778명의 시민이 약 4억원을 모았고, 엔딩 크레디트는 이들의 이름이 약 5분간 이어진다. 염혜란은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저 여기 있다. 저도 이 이야기가 필요하다’라고 손을 드는 것 같았다”며 “이 영화의 완성은 엔딩 크레딧이라는 말에 공감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개인의 이름을 찾는 서사에서 출발하지만, 이름을 잃은 존재들을 다시 호명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또 제주 4·3 역시 ‘이름을 찾는 과정’ 위에 놓인 역사임을 환기한다. 정유진 4.3영화제 관계자는 20일 4·3 담론의 핵심으로 ‘정명(正名)’ 문제를 꼽았다. 그는 “제주4·3평화공원에는 아무 글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있다”며 “아직 사건의 정확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석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이름을 찾는 일이 곧 역사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힌드의 목소리’와 ‘란 12.3’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힌드의 목소리’는 지난 2024년 1월 29일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극영화다.

총격으로 가족을 잃은 여섯살 소녀가 홀로 차량 안에 갇힌 채 수시간 동안 구조를 요청하다 끝내 숨진 비극을 그렸다. 당시 국제구호단체 적신월사는 현장과 불과 8분 거리에 있었지만 적십자사를 통한 이스라엘군과의 협의 절차 때문에 5시간 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상담사 오마르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애를 태우지만, 이미 여러 구조대원을 잃은 책임자 마흐디는 추가 희생을 우려해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영화는 목소리로만 전달되는 소녀의 처참한 상황에 더해, 구호 인력들이 감내해야 하는 긴장과 죄책감, 트라우마를 생생히 전하며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지난 15일 개봉한 이 영화는 CGV 에그지수 96%를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별이 된 아이의 숨 가쁜 목소리가 가슴에 새겨졌다” “전쟁에 희생되는 무수한 민간인들의 비참함이 실제 통화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잔인한 장면이 없었지만, 매우 잔인한 영화” 등 호평과 함께 영화사로 단체관람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수입사 찬란에 따르면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힌드의 목소리’를 관람하는 것 자체가 “범죄 현장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목격자가 된다는 건, 어떤 일에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라며 “이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을 보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부연했다. 유료 관람객 1명당 129원을 적신월사에 기부할 예정이다.

‘란 12.3’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이 자신만의 미학으로 완성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회로 향한 시민과 정치권의 숨 막히는 현장 기록을 중점적으로 담았다.

이 감독은 ‘란 12.3’에 대해 “공포와 불안을 이겨낸 감정의 기록”이라며 “특정 진영의 영화가 아닌 시민이 주인공인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