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치열했던 90년 ‘생애’와 ‘생각’
저서·사료·연구서 등으로 정밀하게 추적
“세계적 정치가의 혜안과 전략 배워야”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 김충남 / 배재대학교 출판부
김충남 박사는 1984년부터 9년 6개월 동안 청와대 비서관으로 세 명의 대통령을 보좌한 ‘대통령학(學)’ 전문가이다. 육사(21기) 졸업 후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으로 10여년 재직하며 한국 대통령의 리더십을 심층 연구했다.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평가 없이 대한민국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그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라는 저서를 최근 냈다. 초대 대통령으로 12년여 재임했던 이승만이 쓴 저서와 자서전, 메모, 연구서들을 토대로 사실(fact)을 씨줄날줄로 엮어 쓴 역저다.
서울시 중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대통령 동상.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참고문헌, 연보, 사진 등을 포함해 400쪽 넘는 분량으로 출처를 밝힌 각주만 330개에 달한다.
책은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와 평생에 걸친 자신 및 외부와의 싸움, 그가 가졌던 생각과 꿈을 간결하고 흥미롭게 그리고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독립협회 회원인 이승만이 1898년 10~11월 서울 종로에서 두 달 동안 계속된 만민공동회의의 농성 등 민주개혁 투쟁을 어떻게 주도했는지 책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사료 추적으로 “23세이던 1898년 초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이 언론인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면서 그해 4월 9일 최초의 한글 일간신문인 ‘매일신문’과 그해 8월 ‘제국신문’ 창간 사실을 적시했다.
두 신문사의 사장 또는 주필 겸 논설위원으로서 이승만의 언론 활동은 입헌군주제 같은 민주정 도입을 요구하다가 역모죄 혐의로 1899년 1월 체포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저자는 이승만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동안 투옥됐던 한성감옥을 선교·연구·교육의 복당(福堂)으로 바꾼 여정도 복원해 냈다.
“감옥 안에는 빈대, 벼룩, 모기가 들끓어 잠자기도 어려웠고 전염병이 퍼지면 한 감방에서 10여명씩 죽어나가기도 했다. 더구나 감방 안은 컴컴하여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중략) 그럼에도 이승만은 여기서 성경을 외우다시피 했고 영어를 연마하여 다수의 외국 신문과 시사 잡지는 물론 해외에서 출판된 역사, 법률, 경제, 종교 등 수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감옥에서 이승만처럼 독서, 번역, 저술 등 학문 활동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지 의문이다.”(17~18쪽)
이승만이 수감 1개월여만에 성경을 읽다가 겪은 영적 체험을 저자는 이승만의 영문 비망록을 통해 밝혀냈다. 29세이던 1904년 2월부터 4개월 동안 감옥 안에서 이승만이 쓴 대표 저서 ‘독립 정신’ 내용을 3개장에 걸쳐 분석적으로 정리·소개(80~108쪽)했다.
1965년 7월 27일 거행된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모습. 서울시 중구 정동교회에서 거행된 영결식이 끝나고 남대문을 거쳐 국립묘지로 향하는 운구를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길에 나와 지켜보며 애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승만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래 감옥살이를 한 우리 역사상 민주 투쟁의 원조”라며 “‘독립정신’은 창의적 개인주의와 개방, 국제 연대를 바탕으로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국가 철학”이라고(13~17쪽) 했다.
196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90세로 영면한 이승만은 봉건적 사회를 민주공화제로 바꾼 혁명가이자,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출중한 지도자, 지성인이었고 세계가 인정한 대정치가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이승만의 진가는 대통령 재임 중 세계 1위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 무대에서 드러났다. 1954년 7월 26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는 공항에선 닉슨 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 부부 동반 영접을, 백악관에선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의 정문 영접을 각각 받았다.
그날 밤 백악관에서 잠을 잔 이승만은 다음날 아이젠하워와의 정상회담장에 30분 늦게 도착했고 회담 중에는 “다른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야겠다”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약소국 대통령이었지만 미국 최고 엘리트들 앞에 주눅은커녕 배짱과 강단을 발휘한 것이다. 미국 지도자들보다 미국의 속성과 논리를 더 잘 아는 ‘내공’과 ‘외교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해 7월 28일 미국 연방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40여분 연설한 이승만은 모두 33차례 기립 박수를 받았다. 닷새 후인 8월 2일엔 외국 국가 원수 중 처음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영웅행진(Canyon of Heroes Parade)을 했다. 이런 모습은 이승만이 한국 대통령을 넘어 용기와 지혜, 비전으로 세계에 기여하는 일류 정치인임을 미국 조야(朝野)가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1953년 3월 9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표지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
전쟁 여파로 나라 전체가 폐허였던 1956년, 81세의 이승만은 원자력 인재 양성에 승부를 걸었다. 1명당 6000달러의 비용이 드는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연구프로그램에 4년간 8차례에 걸쳐 150여명의 훈련생을 유학 보낸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무렵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 남짓한 최빈국이었다.
1959년 1월 원자력연구원을 세운 이승만은 이곳 연구원들에게 일반 공무원의 3배에 해당하는 봉급을 지급했다. 한국이 오늘날 ‘원전 강국’이 되는 씨앗을 이승만이 심고 뿌린 것이다.
김충남 박사는 “이승만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불사른 위대한 계몽자였고 뛰어난 웅변가였고 심오한 사상가였다”(377쪽)고 지적한다. 특히 한국전쟁을 끝내고 군대를 철수하려던 미국에 맞선 이승만이 벼랑 끝 외교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한 걸 ‘신(神)의 한 수’로 꼽는다. 한미동맹 덕분에 안심하고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전념해 우리가 선진국권에 올랐다는 이유에서다.
저자는 “우리 세대는 물론 후손들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승만을 올바로 평가하는 것만이 나라의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승만의 치열한 생애와 투철한 생각, 그리고 탁월한 전략에 관심 있는 이에게 유익을 넘어 감동을 안겨주는 책이다.
저자인 김충남 박사. 안동고와 육사,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대통령과 국가경영: 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2006년)를 포함해 30여권의 저서를 펴냈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기자
fn_getContentDate(‘/load/makecontent/navernewsstand2024v2′,’newsStandAre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