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시에 방치된 빈집 12만채 육박
무작정 철거 후 빈땅으로 둬도 위험
주인 떠난 단독주택, 커뮤니티 공간
아파트는 예술가 작업·전시장으로
이용·관리 주체 있어야 슬럼화 안돼
일본 효고현 고베시 효고구 산노초에 위치한 고주택 ‘아이코야’ 전경. 사진=서혜진 특파원
【파이낸셜뉴스 고베=서혜진 특파원】 일본 효고현 고베시 도심에서 차로 10여분 이동하자 롯코산 자락에 낡은 목조주택이 빼곡한 산동네가 나타났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골목 끝에는 지은 지 100년이 넘은 고택 ‘아이코야(アイコヤ·아이코의 집)’가 있었다. 최근 찾은 아이코야의 기둥과 툇마루, 다다미방은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10년 넘게 비어 있던 집이지만 지금은 요리교실과 꽃꽂이 모임 등이 열리는 주민 사랑방이다. 마당에서는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만들며 여러 세대가 어울린다. 아이코야를 조성한 무라카와 아이코는 “세대를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며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주민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옆에는 낡은 목조 공동주택을 개조한 ‘다니아파트’가 있었다. 예술가들이 방마다 구조가 다른 주거·작업 공간에서 생활하며 작품을 만들고 전시·판매한다. 아이코야와 주민 행사도 연다.
두 건물은 고베시의 ‘건축가와 협업한 빈집 활용 촉진사업’ 지원을 받았다. 건축가와 독창적인 공간으로 개조하고 시 정책 홍보에 협력하면 공사비의 절반을 최대 500만엔(약 4억4500만원)까지 지원한다. 소유자와 건축가, 지역단체를 연결해 비용을 분담하는 방식이다.
고베의 실험은 건물 재생에 그치지 않는다. 나가타구에서는 한신·아와지대지진 이후 방치됐던 땅이 베트남계 주민 중심의 ‘다문화 공생 가든’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외국인이 아닌 지역 주민으로 인정받도록 하자는 취지로 2019년 조성됐다. 주민들은 고추와 허브 등을 함께 기르며 국적을 넘어 교류한다. 고베시의 빈 땅 지역이용 정비사업 보조금과 나가타구의 지역 만들기 활동 지원금이 투입됐다.
빈집을 철거해도 땅을 방치하면 잡초와 쓰레기가 쌓인다. 고베시는 철거를 대책의 종착점으로 보지 않고 빈 땅에 새 용도와 관리 주체를 만들어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바노 테루코 고베시 건축주택국 정책과 빈집·빈터 활용 담당 계장은 “위험한 건물은 철거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집은 개보수와 용도 전환 가능성을 살펴본다”며 “빈 땅도 주민들이 이용하면 관리 주체와 사람의 왕래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일본 빈집 문제의 ‘축소판’ 고베
현재 고베시의 빈집은 약 11만8400채로 이 중 사용 목적이 없는 빈집은 3만9500채다. 산기슭은 경사가 심하고 도로가 좁아 공사와 거래가 어렵다. 교외 신도시는 주민들이 함께 고령화하면서 상속과 빈집 발생이 동시에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고베의 빈집 문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 상속받은 노후주택이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는 일본의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2023년 일본의 빈집은 900만2000채로 30년 전의 약 두 배다. 빈집 비율은 사상 최고인 13.8%이며 사용 목적이 없는 빈집만 385만6000채다. 2038년에는 주택 3채 중 1채가 빈집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빈집은 붕괴와 화재, 범죄 위험을 키운다. 주민 감소로 버스 운행이 중단되고, 상점과 병원이 철수하면 다시 인구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고베시는 개별 빈집을 고치는 ‘점’ 단위 대응에서 주택·교통·상업을 함께 재편하는 ‘면’ 단위 대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올해 관련 예산 8억3900만엔(약 74억7000만원)을 편성하고 철거 지원도 연간 1000건에서 1200건으로 확대했다.
■빈집세부터 성과보수·AI까지
일본 지자체들은 세제와 인공지능(AI), 민간자본을 동원해 빈집의 유통과 활용을 촉진하고 있다. 오사카부 네야가와시는 임대·매각 계획이 없는 빈집에 건물과 토지 고정자산세액의 35%를 추가 부과하는 ‘빈집유통촉진세’를 2029회계연도 도입한다. 시 전역 대상은 일본 최초다. 반대로 지바시는 주택 철거로 세 부담이 약 3배로 뛰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음 해 세액 증가분을 감면한다. 고베시는 실제 거주자가 없는 도심 분양아파트에 빈집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타워맨션뿐 아니라 일반 분양아파트도 포함하고 주민등록 유무를 판정 기준으로 삼는다. 도야마현 이미즈시는 민간자금으로 빈집을 활용하고 성과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는 소셜임팩트본드(SIB)를 2027회계연도 도입한다. 나라현 이코마시는 전문가들이 권리관계를 풀어 8년간 빈집 100건의 매매·임대를 성사시켰다. 요코하마시는 생성형 AI로 빈집 발생 위험을 진단한다.
민간에서도 빈집을 숙박시설과 셰어하우스, 촬영장 등으로 바꾸는 사업이 확산하고 있다. 다만 수요가 없는 지방에서는 과세해도 매수자나 임차인을 찾기 어렵고 소유자 불명 주택의 철거비를 지자체가 떠안는다는 문제도 남는다.
한국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 2024년 행정조사에서 파악된 빈집은 전국 13만4000채다. 농어촌과 구도심에서 빈집이 늘고 있지만 담당 부처와 법률이 달라 통합 관리가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정부는 지난해 범정부 빈집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통합정보 플랫폼과 ‘농촌 빈집은행’, 공공출자 법인이 빈집을 매입·정비하는 ‘빈집 허브’ 도입에 나섰다. 철거 중심 정책을 거래·임대와 주거·문화공간 재생까지 넓히려는 것이다.
일본도 지역별 수요에 따라 빈집 정책의 성과가 엇갈린다. 한국 역시 전국 현황 파악을 넘어 입지와 노후도, 시장 수요에 따라 철거·거래·활용 대상을 구분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서혜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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