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1년 내내 칼 갈았다"…베트남 한국학 명문대들이 9월만 기다리는 이유는?[동남아 돋보기]

한글날 시리즈

제5회 대사배 베트남 전국 한국어 말하기대회 개최

베트남 전역 94개 기관 참여…대학 대항전 방불에 응원전까지

“어머니와 남이섬 가고파…대한항공 승무원 되고파”

역대 수상자들, 삼성전자·대사관 취업, 서울대서 학업 이어가

다음 달 9일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해 [동남아 돋보기]가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의 한국어 교육 현장으로 찾아갑니다. 현지에서 불고 있는 뜨거운 한국어 열풍과 생생한 교육 현황을 향후 수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전해드립니다.

지난 26일 베트남 하노이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대사배 베트남 전국 한국어 말하기대회’ 시상식 후, 이미연 주베트남 대한민국 대사 지명자(두 번째 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수상자 및 심사위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하노이 한국문화원 제공

【하노이(베트남)=김준석 특파원】

“기계는 인간보다 정보를 더 빨리 축적하고 처리할 수는 있어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약자를 포용하는 마음은 결국 흉내 낼 수 없습니다.”

26일 베트남 하노이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대사배 베트남 전국 한국어 말하기대회’ 일반부 전공부문 결선 무대. 대상 수장자인 레 득 틴 하노이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은 인공지능(AI) 시대에 필요한 가치로 ‘인간의 공감과 포용’을 꼽았습니다. AI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혜택에서 소외되는 이들을 보듬는 사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어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AI가 발전하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추가 질문에도 틴 학생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틴 학생은 “언어 공부는 단순히 말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다”라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것이 언어를 배우는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은 이번 대회에는 베트남 전역 28개 대학과 49개 중·고등학교, 17개 세종학당 등 모두 94개 기관이 참여했습니다. 2022년 50개였던 참가 기관은 2023년 64개, 2024년 66개, 2025년 77개에 이어 올해 94개까지 늘었습니다.

기관별 예선과 하노이·호찌민에서 열린 북부·남부 본선을 거쳐 선발된 18명은 이날 중고등부·일반부 비전공·일반부 전공 등 3개 부문으로 나뉘어 최종 무대에 올랐습니다. 참가자들은 ‘나의 소망 목록(버킷리스트)’과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제로 한국어로 자신의 생각과 꿈을 풀어냈습니다.

대사관은 일반부 전공·비전공 부문 대상 수상자에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6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중·고교 부문 우승자에게는 한국관광공사가 제공하는 한국 관광 기회가 주어집니다.

지난 26일 베트남 하노이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대사배 베트남 전국 한국어 말하기대회’에 일반부 전공부문으로 참가해 대상을 수상한 레 득 틴 하노이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하노이 한국문화원 제공

특히, 한국어와 한국학과 전공자들이 대거 참여한 일반부 전공 부문은 마치 대학 대항전을 방불케 했습니다. 하노이국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하노이대학교, 호찌민국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등 베트남 내 내로라하는 한국어·한국학 명문 대학들의 자존심이 걸린 무대였습니다.

이날 학생들을 응원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한 교수는 “대사배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각 대학 한국어 학과의 명예를 건 한 판 승부나 다름없다”며 “학생들과 교수진이 1년 내내 머리를 맞대고 대회를 준비할 만큼 열기가 뜨겁다”고 전했습니다.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무대에서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역할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잇따랐습니다.

레 후이 득 아인 하노이국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한국학과 학생은 AI 시대에 필요한 가치로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꼽았습니다. 아인 학생은 “AI에게 빈칸을 주면 곧 답을 채워주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답으로 채울 수 없는 빈칸도 있다”며 “AI가 답을 찾는 동안 저는 사람을 바라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아인 학생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학과 선후배와 동기들은 직접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열띤 응원을 펼치며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노이국립대 인문사회과학대 한국학과 학생들이 지난 26일 베트남 하노이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대사배 베트남 전국 한국어 말하기대회’에 참가한 레 후이 득 아인 학생을 응원하고 있다. 사진=김준석 특파원

버킷리스트를 주제로 발표한 참가자들은 각자의 삶에 담긴 쉽사리 꺼내기 힘든 사연을 풀어놓으며 때로는 참았던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루 튀엣 니 호찌민국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한국학과 학생은 자신의 삶을 모래시계에 비유하며 등산과 춤, 그리고 어머니와의 여행을 버킷리스트로 꼽았습니다.

특히 어머니와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습니다. 20년 넘게 홀로 두 딸을 키워온 어머니가 최근 큰 수술을 겪으면서 평범하게 여겼던 가족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니 학생은 “너무 늦기 전에 꼭 엄마와 바다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하다 목이 메기도 했습니다. 심사위원석과 관중석에서는 따뜻한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지난 26일 베트남 하노이한국국제학교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대사배 베트남 전국 한국어 말하기대회’에 일반부 비전공부문으로 참가해 우수상을 수상한 도안 응우옌 푸엉 린씨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하노이 한국문화원

일반부 비전공 부문 참가자인 판 탄 끄엉씨는 세 가지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로 남이섬 여행을 꼽았습니다. 어머니가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좋아해 남이섬을 알게 됐고, 자신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가 “나중에 한번 가보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계기가 됐습니다. 끄엉씨에게 남이섬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선물하고 싶은 추억이 됐습니다.

하노이 2세종학당 대표로 참가한 도안 응우옌 푸엉 린씨는 “이화여대 어학연수 장학금을 받고 대한항공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린씨는 신데렐라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요정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1인극 형식으로 자신의 세 가지 소망을 소개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결선 무대에서는 올해 참가자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앞선 대회 수상자들의 현재 모습도 소개됐습니다.

2022년 제1회 대회 일반부 전공 부문 수상자인 하 투 호아이씨는 현재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회 무대에서 한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던 경험은 한국에서의 학업과 다양한 경험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23년 중고교 부문 수상자인 레 투이 짱씨는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회 수상으로 제공된 한국 여행을 통해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경험은 한국어 공부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고, 이후 서울대 진학이라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했습니다.

2024년 일반부 전공 부문 수상자인 쩐 투 떰씨는 현재 주베트남대한민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말하기대회에서 시작된 경험은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실제 외교·교류 현장에서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가교로 이어졌습니다.

2025년 일반부 비전공 부문 수상자인 응우옌 바오 찌씨와 일반부 전공 부문 수상자인 응우옌 민 쩌우씨는 대회 수상을 계기로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미연 주베트남대한민국대사는 “베트남 한국어 학습자들과 함께 성장해 온 대사배 한국어 말하기대회가 어느덧 제5회를 맞이했다”며 “베트남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국어가 제1외국어로 선정되는 등 베트남 내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만큼, 한국어 학습자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한국어를 학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동남아 돋보기]는 글로벌 공급망과 외교·안보의 핵심 요충지로 부상한 동남아시아의 주요 현안과 비하인드 뉴스를 현지에서 생생하고 깊이 있게 전하는 코너입니다.

[email protected]

김준석 기자